|
영화 <하류인생>
|
[토요판] 이승한의 몰아보기
<하류인생>(2004, 임권택)<티브이엔><교육방송>(EBS) 23일(일) 밤 11시 2000년대엔 대부분의 대학이 비슷했겠지만, 유독 양평동 이씨가 다니던 학교에는 이상하리만치 운동권 학생들이 없었다. 아니, ‘권’은 고사하고 학생들끼리 정치적인 의견을 나눌 기회 자체가 없었다.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스펙 경쟁’이란 단어는 아직 등장하기 전이었지만, 다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살기 위해 스펙 경쟁을 치열하게 하고 있던 때였으니까. 경기는 안 좋았고 취업 문은 점점 좁아졌으므로, 다들 생존 경쟁 외에 다른 일을 할 여력이 없는 분위기였다. 어느 해였던가. 봄비치곤 빗방울이 굵던 3월 아침, 학교와의 협상에 실패한 당시 총학생회는 등록금 인하 투쟁에 돌입했다. ‘비권’ 학생회라 전에 안 해 본 일을 하려니 좀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펼침막에 유인물까지 구색은 갖췄다. 부학생회장이 우비를 입고 정문 앞에 서서 유인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는데, 경이로운 일이 벌어졌다. 학생들이 부회장 주위를 빙 돌아가거나, 유인물을 받더라도 대체로 읽기도 전에 쓰레기통에 버리고 제 갈 길을 갔던 것이다. 등록금 내리자는 이야기니 다들 읽어보겠지 하고 유인물을 산더미처럼 들고 온 부회장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아마 거의 전량을 고스란히 들고 돌아가야 했으리라. 어디선가 “이 비에 쟤는 무슨 삽질이니”라는 비아냥이 들려왔고, 부회장의 얼굴은 빗물과 눈물이 뒤섞여 엉망이 되었다. 이씨는 그 광경을 보며 영화 <하류인생>을 떠올렸다. 중앙정보부와 결탁해 군납업자가 되어 승승장구하던 태웅은, 어느 날 정보부의 이중계약에 물을 먹고 격분해서 거리로 나왔다가 유신 반대시위를 하는 학생들과 마주친다. 학생들을 이해할 수 없던 태웅으로선, “학생 놈의 새끼들이 공부는 안 하고, 왜 지랄이야”라고 뇌까리는 게 전부였다.
|
이승한 티브이평론가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