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0.18 20:54
수정 : 2012.10.19 08:23
류호진의 백스테이지
처음엔 엄청난 스타 그룹인 줄 알았다. 아직 음악 프로그램에 배치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무렵이다. 무대 동선을 물어보는데 말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는 팀이 있었다. 무슨 얘길 해도 건성건성,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들은 무대 위를 바라보며 몸을 뒤틀거나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산만한 태도를 보였다.
소녀시대나 원더걸스조차 제작에 관련된 스태프의 질문이나 요청에는 정중한 대답을 하고, 다른 아티스트들에게는 늘 상냥하게 인사를 한다. 그것은 스튜디오의 예절이다.
아무래도 불편한 기분이 들어 작가에게 물었더니 “오늘 데뷔하는 소문난 신인 그룹”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얼마나 괴물 신인이길래’ 하며 나는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그들은 말도 없이 무대 위로 올라가서 리허설을 위해 자리를 잡았다. 조명이 들어오고, 음악이 나오고, 그들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3분 남짓. 나는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거칠면서도 정교한 춤과 노래 때문에 스튜디오가 터질 것 같았다. 무대가 끝날 무렵엔 팔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거만하게 굴 만한 실력이 되는구나 생각하며 다음 팀을 부르려는데, 무대에서 내려오던 그들이 느닷없이 땅에 닿을 듯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스태프들과 선배 출연자들에게 끝없이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쳐댔다. 그들은 거만했던 것이 아니라 첫 무대를 앞두고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던 것이다.
<뮤직뱅크>에서 1년 정도 일하면 대략 1000번의 무대를 지켜볼 기회가 생긴다. 케이팝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스타들의 노래도 정말 코앞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멋졌던 무대가 뭘까 하고 돌이켜보면 그건 소녀시대나 원더걸스의 무대는 아니었다. 내가 눈부시다고 기억하는 무대는 거의 다 신인 그룹의 첫 무대였다. 이건 글을 쓰자고 꾸며낸 이야기나, ‘꽃들에게 희망을’ 부류의 수사학이 아니다. 일종의 심령현상에 가깝다.
모든 신인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어떤 신인들은 인생 첫 무대에서 섬광 같은 것을 보여준다. 그건 꿈꾸는 듯한 눈빛, 환한 미소, 수천번의 반복을 통해 다져진 완벽한 동작들이 만나서 터지는 불꽃놀이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그 섬광은 그들의 두번째 무대에서는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다. 빛이 사그라지고 나면 그들은 다시 평범한 신인 중 한 사람이 되어 기나긴 기다림과 수련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아이돌 가수들은 꿈을 위해 소중한 청춘의 전부를 춤과 노래 연습에 바친 사람들이다. 연습생이라는 특이한 문화로 인해 케이팝은 그 어느 나라의 음악보다 정교한 노래와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실패에 대한 공포와 눈물 나는 기다림, 엄청난 양의 연습과 연습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그들이 인생 최초의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수년 동안 꾼 꿈을 3분이라는 시간 동안 연소시키는 격렬한 화학반응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마 그 연소의 빛을 본 것이리라.
무대 밖에 서 있는 나는 그런 빛을 발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연인이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이나 부부가 아이를 얻는 순간, 내 집을 마련하거나 원하는 직장에 채용되는 그런 순간에는 아마 우리의 얼굴에도 그런 섬광이 빛나고 있지 않을까. 나는 무대 위에서 춤추던 이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무대 밖의 세상에서도 그런 섬광을 볼 수 있길 바란다. 그런 빛이 많은 사회가 더 환한 사회일 거라고 생각한다.
류호진/한국방송 예능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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