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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07 18:45 수정 : 2005.09.08 14:02

정이현 소설가

저공비행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빠져든다
연애판타지 서사 때문일까

주말 저녁,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널찍한 식당 한쪽에는 대형 벽걸이 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었다. 열심히 고기를 굽다 말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아뿔싸,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친애하는 나의 일행들. 그들의 시선이 오로지 한곳,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테이블 사정도 비슷했다. 심지어 직원 아주머니들도 상추와 김치그릇, 소주병과 콜라병을 나르는 틈틈이 티브이 속 세상을 훔쳐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맵싸한 소외감이 밀려왔다. 대관절 저게 뭔데, 왜 나만 모르는 거지?

사회자는, 우렁찬 수다로 감각신경 교란시키기 신공의 소유자 강호동씨. 출연자는 남자 일곱에 여자 일곱. 한창 인기 절정의 꽃미남 꽃미녀 연예인도 있고, 본업이 무언지는 잘 모르지만 약방의 감초처럼 오락 프로그램마다 얼굴을 내밀며 구박 받는 역할을 도맡아 하는 연예인도 있다. 그렇다. 토요일 저녁 삼겹살 집 안 거의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붙들어 맨 그 코너의 이름은 ‘연애편지’란다. 부제는 ‘리얼 로망스’. 그러니까 저 모든 것이 실제상황이라는 뜻인가?

“왜 다들 목 빠져라 보는 거야? 떼거지로 우르르 나와서 지들끼리 웃고 떠드는 게 뭐가 재미있다고.” “엉, 너 저거 안 봐? 지난주에 A가 B를 찍었거든. 고백하겠다면서 노래도 불러주고 B는 답례로 이마에 뽀뽀해주고 둘이 완전 연결되는 분위기였어. 근데 글쎄, 저기 C있지? 아무도 예상치 못했는데 C도 사실 B를 짝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일이 이상하게 되니까 C랑 예비 커플이던 D가 화가 나서 또 딴 남자 E한테 가고….” 미안하다, 친구야. 뭔 말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삼각도 아닌, 사각관계를 넘어서는 복잡한 연애지형도에 대한 설명인 것 같았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남의 연애 얘기야 어쨌거나 흥미로운 일. 나는 학구적인 자세로 다시 질문했다. “그럼 지금 저게 다 진짜야? 저 가수가 진짜로 저 탤런트를 좋아한다고?” 친구가, 너 바보냐,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글쎄, 뭐, 설마 그렇기야 하겠냐.”

때론 킥킥거리면서 즐겁게, 때론 이마에 부채꼴 모양의 주름을 잡으면서 심각하게 젊은 연예인들의 ‘사랑 찾기 서바이벌 게임’을 구경하는 시청자들은 그러니까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자기 마음을 받아달라고 장미꽃을 바치며 애원하는 저 남자나, 다른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는 파트너를 애달픈 눈길로 바라보는 저 여자나 실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하는 이나 보는 이나 매순간 진지하기는 마찬가지다. 무엇이 모두를 몰두하게 할까. 혹시, 현실과 몹시 닮아있지만 실제로는 현실을 비스듬히 비켜가는 연애판타지의 서사 때문은 아닐까.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뚜렷한 내러티브와 변화무쌍한 감정선에 있다. 또한 출연자들은 로맨틱가이, 부담보이, 내숭원단, 주책바가지 등등의 캐릭터를 덧입고, 각각의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한다. 현실의 축소판이므로 물론 그 안에도 등급과 서열이 존재한다. 많은 이성들의 인기를 얻는 강자가 있고 사랑을 애걸해도 매번 커플선택에서 탈락하는 약자도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조건으로 작동하는 것은 ‘몸’이다. 외모, 춤실력, 노래실력, 날쌘 운동신경, 진실하게 반짝이는 눈빛까지. 어차피 일회적인 파트너 선택이므로, 속세의 남녀관계에서라면 신경 쓰일 각종 ‘현실적인 조건들’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상대방의 출신학교, 연봉, 직업의 안정성, 주거현황, 부모형제를 부양할 가능성 같은 세속적 잣대들 말이다.

현실을 닮아있으되, 현실의 가장 냉혹하고 구질구질한 부분이 제거된 판타지. 그래서 ‘리얼로망스 연애편지’를 입 벌리고 보고 있으면 꼭 초등학교 육학년 무렵으로 되돌아 간 기분이 든다. 그 퇴행의 쾌감은 달콤하고 또 씁쓸하다.

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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