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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간 단벌 양복 차림으로 세월호 참사 보도를 했던 손석희는 후배 기자의 실수에 대신 고개를 숙였다. 진심 어린 보도로 JTBC를 공정방송 자리에 올려놓고도 권한을 누리기보다 책임을 짊어지는 손석희의 리더십은 패션에서도 드러난다. 단정한 셔츠에 깔끔한 재킷처럼 꾸밈없는 진정성은 인간 손석희의 매력이다. /강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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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서 5일간 단벌 차림, 고도의 연출이라고?
“요즘 한국의 컨트롤타워는 손석희”란 말 나오는 상황
언젠가 영국 디자이너 비비언 웨스트우드는 이런 말을 했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고 싶다면 한동안 같은 옷을 매일 입어보라고. 그 한동안은 1년일 수도 있고 한 달일 수도 있고 일주일일 수도 있는데, 중요한 건 가장 자기다운 옷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하튼 이제 와 생각해보니 웨스트우드의 그 말은 세월호 참사 이후 ‘기레기’들의 대안으로 급부상한 두 언론인 손석희와 이상호의 옷차림을 두고 한 말 같다.
지난 4월25일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한 날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흠잡을 데 없이 매끈한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그를 맞는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의 민주당 당색을 상징하는 듯한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다. 다른 방송사 기자들이 한-미 두 정상의 만남을 취재하느라 청와대와 서울을 분주히 오가는 사이 JTBC의 손석희 앵커는 전남 진도 팽목항에 내려와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4월26일 팽목항 첫 생방송 때부터 4월29일까지 내내 감색 셔츠에 연한 회색 V넥 니트, 그 위에 입은 짙은 회색 재킷 차림이었던 건. 여하튼 첫날에만 니트를 입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닷새 동안 같은 옷차림이었다. 팽목항에 머물며 뉴스를 진행하는 동안 손석희는 오바마의 방한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모든 진심을 담아 세월호 참사 보도에 최선을 다했다.
세월호 참사 보도에서 손석희가 보여준 언론인의 노력, 후배 기자의 실수에 대한 리더로서의 빛나는 사과, 진도 팽목항까지 달려가 현장의 목소리를 최대한 생생하게 전하려는 진정성 있는 태도에 많은 이들이 감동했다. 언론 인터뷰를 꺼리던 유가족이나 실종자 가족들도 JTBC에만큼은 마음을 열었다. (한 실종자 아버지는 스스로 JTBC 중계차를 찾아가 인터뷰 영상을 찍었고, 같은 날과 다음 날 두 명의 단원고 학생 사망자 부모는 JTBC에 아이의 휴대전화 속에 담긴 동영상 파일을 건넸다.) 민간 인양업체 ‘언딘마린인더스트리’의 구조 독점 의혹을 알리는 익명·실명의 제보자들도 잇달아 JTBC를 찾았다. 그 덕분에 JTBC <뉴스9>는 동시간에 방영되는 MBC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을 넘어섰다.
물론 개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닷새 동안의 단벌 양복 차림조차 고도의 연출일 수 있다’고. 나도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 동의했다. 하지만 손석희라는 인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지금, ‘그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차가울 정도로 깨끗하고 단호한 이미지, 진지하고 이성적인 태도, 무엇보다 언어의 절제미를 보여주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진행 솜씨로 범국민적 신뢰를 얻은 그이지만 실제 인간 손석희는 그 이미지와는 영 딴판인 사람이라고 한다. ‘절제된 형식주의’를 너무나 싫어해서 클래식 공연장에는 가지 않으며, ‘자신이 상소리를 잘한다는 이유로 깨끗하고 정중한 언변으로 무장된 사람을 인간적으로 믿지 않는다’니 놀랍지 않나?
연출이든 아니든, 신뢰를 입은 손석희
그런가 하면 고등학교 시절 독서실 옆자리에서 처음 만나 대학 때까지 우정을 쌓았다는 디자이너 장광효의 증언에 따르면, 손석희는 “대학 시절 4년 동안 머리부터 발끝까지 항상 똑같은 패션을 유지할 만큼 검소함이 몸에 밴 친구였”고 “아나운서로 30년간 재직할 당시에도 거의 단벌에 가까웠”단다. 아마 단벌은 아니었을 거다. 내가 아는 한 MBC 아나운서들은 1년에 한두 번 회사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의상구입비를 받는다. 그런데 MBC 보도국을 대표하는 ‘간판 스타’ 손석희 선배는 ‘옷에 돈 쓰는 걸 싫어해서 원래 가지고 있는 그리 많지도 않은 양복으로 버틴다’는 말을 한 후배 아나운서에게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의 진심이 ‘고도의 전략’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의심할 수 없다. 1988년 MBC 노조 파업 당시 ‘공정방송 쟁취’가 쓰인 리본을 ‘달고 나갈 용기도 없고 달지 않을 용기도 없’어서 양복 안쪽 와이셔츠에 리본을 달고 뉴스를 진행했던 자신을 회고하며 “양복 속에서 삐죽이 보일 듯 말 듯했던 리본은 내가 기회주의자임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었다”고 했던 그가 아닌가? 1992년 MBC 파업 때는 파업 주동자로 몰려 20일간 구치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찬 그때 그 사진이 지금껏 회자되지만 그는 그 상황에 대해서도 “한 일도 없는데 무슨 민주투사라도 되는 양 대접받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했다. 그는 그만큼 진솔한 사람이다. 그 진솔함 안에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의 과오와 실수를 객관화해 즉각적으로 반성하고 만회할 줄 아는 힘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한때 손석희의 선택을 의심스러운, 아니 의심스럽다기보다는 다소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위법과 탈법으로 출범한 보수언론 방송사 JTBC 사장 자리라니…. 손석희 개인의 양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과연 삼성과 <중앙일보>의 영향력 아래서 JTBC 사장 한 사람의 힘으로 ‘건강한 시민사회’ 편에 서는 ‘감시견’으로서의 정론 저널리즘을 실천할 수 있을지 의심하고 걱정했다.
그런데 해냈다. 대단하지 않은가? 종편 출범 때 TV조선, 채널A와 함께 JTBC 개국을 거세게 반대했던 시민단체들이 이제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징계’에 맞서 JTBC의 비판적 공정방송을 응원하는 지원사격에 나서고 있다. 물론 그 중심에 손석희가 있다. 권한을 누리고 그 권한으로 ‘책임을 묻는 리더’가 아니라 조직원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고 변화시키지 못한 부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는 진정한 리더’로서 손석희.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그가 보수언론으로 낙인찍힌 매체의 방송사에서 이제는 너무 ‘진보 편향’적인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듣는다는 거다. 그 말은 내게 결국 그가 목표로 했던 지점, 진보·보수 프레임을 초월해 ‘사회 통합 기능’을 수행하는 이상적 공정방송의 비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것도 매우 성공적인 모습으로. 이쯤 되면 손석희를 쫓아내준 친정 MBC에 고맙다고 해야 하나?
MBC 사장이나 보도국장들 눈에 손석희가 얼마나 눈엣가시 같을까? 국민에게 신뢰와 사랑을 받는 공정방송 자리를 손석희와 JTBC 보도국에 빼앗긴 거나 다름없으니. “요즘 대한민국 컨트롤타워는 다름 아닌 손석희”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그 때문에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MBC의 한 보도국 기자는 “하루빨리 세월호 국면이 끝나길 바라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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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의 자연스러운 남성미는 손석희의 절제된 정제미와는 또 다르다. 사파리 재킷과 검은 양복바지, 그리고 운동화라는 독특한 조합은 거침없는 기자 정신과 어울린다. 세월호 참사 취재 현자에서 그는 거의 한 달째 같은 옷차림이었다. 그의 모습은 프로의 섹시함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강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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