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현 소설가
|
저공비행
당신의 대답이 ‘당신의 모든 것’ 이다 선택은 두 가지다. 문화방송인가, 한국방송인가? 늘 엎치락뒤치락하는 것 같은데, 요새는 시청률 면에서나 화제성 면에서나 문화방송 쪽이 우위에 선 분위기다. 저녁 여덟시 삼십분 경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일일드라마 얘기다. 이 드라마들의 특징은, 일주일에 두어 번 건성건성 봐도 사건개요 및 전개현황을 다 파악할 수 있다는 거다. 현실 속의 이웃집 사연이라면 ‘엽기적인 데다가 바람 잘 날 없는 복잡한 집구석이군. 정말 안 됐다’ 면서 혀라도 찼겠지만, 이제는 면역이 되어버린 건지 아무리 자극적인 사건이 연속해서 일어나도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종영을 앞두고 막바지 피치를 올리고 있는 문화방송 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미용사의 꿈을 키우며 살아온 나금순양이 재혼을 결심하고 시집식구들과 겪는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문제의 핵심은 유복자로 태어난 아이의 거취문제. 자신의 아이이니 당연히 데리고 가겠다는 엄마 금순과, 죽은 아들의 ‘씨’를 받은 금쪽 같은 손자를 죽어도 내줄 수 없다는 조부모 간의 다툼이다. 특히 평소 인자한 성품으로 묘사 되어왔을 뿐더러 그나마 금순을 가엽고 애틋하게 여겨오던 시아버지의 변절(?)이 놀랄 만하다. 변절이 아니라 본성이 드러난 것뿐이라는 견해도 있으며, 아무리 착하고 올곧은 성품일지라도 제 핏줄 문제가 불거졌다 하면 한국 아저씨들 중 99%는 저렇게 되고 말 거라는 측면에서 매우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성시청자를 중심으로 한) 여론의 대세는, 금순에게 아들을 놔두고 나가도록 요구하는 시부모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 그들의 무리한 요구는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는 무지몽매한 어르신의 몽니일 뿐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금순 모자의 운명을 걱정하며 시부모와 제작진을 성토하는 이유는 드라마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간구하기 때문일 터이다. ‘시청자들은 미디어에서 주입하는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가치관을 가진 등장인물이 나와서 바락바락 우겨대면 시청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도 아직 유효하다. 그런데, 가끔 궁금하다. 시청자란 누구일까? 그들은 그저 바보상자 앞에 넋 놓고 앉아 드라마가 주입시키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멍청이들’일까?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르다. 혹자가 보기에는 한심하고 짜증날 뿐인 드라마 시청률을 한없이 치솟게 하는 시청자들은 결코 그 드라마의 메시지에 무조건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집집마다 드라마를 보면서, 금순이 말이 맞네, 시부모 심정도 이해해줘야 하네, 호주제가 어떻게 바뀌었네, 설왕설래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제각각의 시청자들이 처한 개인적 입장에 따라 드라마를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텔레비전 드라마 시청의 행위는 일방적이거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문화적 실천행위일지도 모른다. 드라마는 예전의 지배적 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충돌하는 공간이며, 시청자는 그 공간에 간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가치를 점검하는 하나의 계기로 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는 바보상자도 아니고, 시청자도 바보가 아니다. 확실히, 시청률 높은 드라마에는 ‘무언가’가 있다. 훌륭한 작품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논쟁거리’는 던져준다는 뜻이다. 드라마가 설정하는 의제는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치관 변화의 문제들을 절묘하게 건드리고 있다. 자, 당신은 과연 금순이의 아들 휘성이를 누가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뭐라고 대답해도 좋다. 다만 당신의 대답이 곧 ‘당신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만은 잊지 마시길. 정이현/소설가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