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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2일 서울 연남동 근처의 한 카페에서 방송인이자 글쓰는 사람 허지웅을 만났다. 허지웅은 기자겸 논객에서 출발해 셀러브리티로 향하는 미답의 길 한가운데 서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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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이자 논객에서 출발한 ‘셀러브리티’ 허지웅, 그가 말하는 ‘버티는 삶’이란
“제주도 자연이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제주도 부동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게 씁쓸하다.” JTBC의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 <썰전>에서 허지웅이 한 말이다. 이효리를 비롯한 여러 뮤지션·배우·작가들이 제주도로 향하고 그에 따라 부동산 투자 열풍이 함께 부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 중이었다. 허지웅은 “홍대 입구에서 상수동, 다시 연남동으로 밀려났다. 언제까지 밀려나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자본이 서민을 내모는 대도시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제주라고 다르지 않을 거라고 짚었다. MBC의 교양국 해체와 관련해서도 에두르거나 단서 달지 않고 명확하게 비판한 유일한 패널이었다.
버티기, 그의 유일한 처세
연애 토크 프로인 <마녀사냥>에서 허지웅은 안 하는 말이 없다. 콘셉트가 명확하지 않았던 1회부터 성시경 등이 어색해하는 가운데 성과 관련한 용어와 이야기를 막힘없이 풀었다. 이혼 경력을 털어놓는 태도에도 숨기려는 기색이 없었다. 지금 ‘방송인’ 허지웅은 발언의 여파를 크게 고민하지 않고, 영역 가리지 않고 있는 대로 생긴 대로 말하는 드문 캐릭터다. 이 캐릭터로 그는 리얼리티 예능 프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에서 확인되듯 여고생들로부터 “잘생겼다” “꺅” 같은 비명의 수신처가 되기도 했다. 허지웅은 기자이자 논객에서 출발해 유명세와 팬덤까지 얻은 ‘셀러브리티’로 향하는 미답의 길 한가운데 서 있다. 최근 그가 펴낸 에세이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논란의 한가운데 있었던 그의 글들(‘<나는 꼼수다> 팬들의 맹목을 비판하고 열성 노무현 팬덤의 부작용을 지적한)에 비해, 또 그가 방송에서 쌓아올린 이미지에 비해 순하다. 이런 평에 그는 “최근 내 글을 안 읽어서 그렇게 느끼는 거고, 글이 그렇게 변한 지는 꽤 됐다”고 말했다.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책 낸 지 일주일 만에 3쇄를 찍었고, 한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 5만 부가 팔리며 온·오프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수위권을 지키고 있다. 온라인 서점 구매층의 65%는 20∼30대였고, 남녀 비율은 4:6이었다. 그를 만났다.
-책 제목도 그렇고 ‘버티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왜 버티는 것에 착안했나.
=평소 자주 써왔던 주제다.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 ‘저렇게 하면 뭘 피해갈 수 있다’ 유의 처세 기능을 설명할 수 있는 경험도 없지만, 그런 처세 기술이 애당초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걸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이른바 멘토들이 가증스럽다. 에세이는 내가 사는 이야기를 주로 쓰는데, 그걸 하나의 주제로 모아서 표현할 때 ‘버틴다’는 말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해왔다. 나에게 가능한 유일한 처세는 버티는 거였다.
-지금 허지웅이 ‘버티는 삶’을 말하기엔 너무 잘나가는 것 아닌가.
=글쎄, 잘나간다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 원래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내 일의 연장선 위에서 방송도 하는 건데 “잠깐 뜨고 말겠지”라거나 “쟤 연예인 되더니…”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런 소음들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내가 하는 일을 묵묵히 하는 것. 내 일이 묵묵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버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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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2일 서울 연남동 근처의 한 카페에서 방송인이자 글쓰는 사람 허지웅을 만났다. 허지웅은 기자겸 논객에서 출발해 셀러브리티로 향하는 미답의 길 한가운데 서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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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작심하고 노력과 고생을 통해서 한 고비를 넘기는 거랑은 조금 다른 뉘앙스다. 버틴다는 것은 나에게 좋은 의미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오랫동안 할 수 있는 몸과 태도를 만드는 것이다. 나에게 그건 글 쓰는 것이다. 방송을 하는 중에도 어떻게든 글 쓰는 게 나의 근간이다. 그걸 위해 시간을 내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글 쓰지 않으면 방송 건달
방송을 통해 인지도가 높아진 허지웅은 책에서 “글 쓰는 허지웅”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한다. ‘자기 선언’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자기 선언’처럼 들린다. “‘글 쓰는 허지웅입니다’라는 말을 입으로 소리내어 발음해본다. 저 말은 내게 전보다 더 절실한 의미가 되었다. (중략) 이제 와 나는 글을 쓰지 않으면 방송 건달일 뿐이다.”
-왜 글쓰는 일이 좋은가.
=나에게 글 쓰는 일이란 내 자신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아무 대책 없이 사는 사람은 아니구나. 내 스스로 남에게 내보이기 부끄럽지 않은 뭔가를 계속 생산해낼 수 있다는 것이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바탕이기도 하다. 문장으로 정확히 써놓아야 안다는 느낌이 든다. 문장으로 써보지 않은 상태에서 말을 하면 엉킨다.
-방송을 선택할 때도 ‘글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하나.
=‘나는 글 쓰는 사람이어서 이건 안 해요’라기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관심 있는 것을 한다. 제작진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면 하고. 지금 하는 <마녀사냥>의 정효민 PD나 <썰전>의 김수아 PD는 모두 젊고 반짝반짝하는 사람들이다.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게 즐겁고 좋다. <썰전>은 비평 프로그램이어서 방송인인데 방송인 아닌, 제3자로서의 이미지가 보탬이 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마녀사냥>은 방송에서 사람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 안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반’도 거기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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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2일 서울 연남동 근처의 한 카페에서 방송인이자 글쓰는 사람 허지웅을 만났다. 허지웅은 기자겸 논객에서 출발해 셀러브리티로 향하는 미답의 길 한가운데 서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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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녀오겠습니다>는 왜 한 건가.
=PD한테 설득당했다. 대중매체가 비추는 고등학생은 탈선했거나, 모든 종류의 권위를 거부하거나 학교폭력의 가해자거나 피해자다. 그런 모습이 아니라 아이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게 기획의도라고 했고, 거기에 동의했다. 세월호 사고에서 구해내지 못한 아이들도 영향을 미쳤다. 세월호는 정말 끔찍한 사고다. 교통사고가 나서 차 안에 아이들이 가득 있는데, 국회의원은 “이건 그냥 교통사고”라고 말하며 지나가고, 어른들은 그 주위를 빙 둘러싸고 죽어가는 걸 구경했다. 프랑스인에게 알제리가 새겨져 있는 것처럼 세월호 사고는 한국인들의 DNA에 깊숙이 새겨졌다고 생각한다. 끔찍하고 창피한 이 기억이 한국 사회를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눌 것이다.
-휴대전화 반납, 복장 규제 등에 대해 의외로 군말 없이 순응하더라. 좀 다르게 반응할 줄 알았는데.
=아이들이 있으니까. 앞에서 혼자 튀거나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았다. 문신도 가릴 수 있는 긴팔 옷을 달라고 했다. 근데 그렇게 해도 역시 나는 욕을 먹더라. 점심시간에 선생님께 어렵게 허락을 얻어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그런 추억 하나쯤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랬더니 면학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 난 영원히 욕먹는 사람이야. 뭘 해도 욕먹는다. 애초에 남들이 하지 말라거나, 딱히 대단하고 구체적이고 정확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그래왔던 것들에 대해 비틀고 조롱하는 걸 하고 싶었다. <썰전>과 <마녀사냥>에서 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그런 걸 하고 나면 스스로 뭔가 성취했·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 게 얼굴에 드러나서 미워 보이는 건 아닐까.
-냉소하는 듯한 말투 때문은 아닌가.
=냉소적이려고 냉소한 적은 없다. 영화평을 비롯한 글을 쓸 때, 영화나 어떤 상황에 빠져 있을 때랑 하루쯤 지나서 글을 쓸 때 굉장히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객관화’는 내가 글을 쓸 때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정이다. 객관화 과정을 통해 내가 본 ‘사실’을 쓴다. 내가 ‘사실’이라고 쓴 것을 사람들은 ‘냉소’라 읽더라. 삐딱하다고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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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2일 서울 연남동 근처의 한 카페에서 방송인이자 글쓰는 사람 허지웅을 만났다. 허지웅은 기자겸 논객에서 출발해 셀러브리티로 향하는 미답의 길 한가운데 서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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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사람 괴물 만드는 것들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서 그가 주요하게 쓰는 또 하나의 주제는 멀쩡한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편견·금기·황색 저널리즘에 관한 것이다. 최민수씨 사건이 대표적이다. 2008년 ‘노인 폭행 의혹’ 사건으로 드라마·영화 출연이 무산됐고, 그는 당시 천하의 패륜아가 됐다. 허지웅은 ‘최민수 노인 폭행 의혹’ 사건이 무혐의로 처리돼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건 당시 용산경찰서에서 이틀 동안 사건을 취재했다. “그렇게 난리였는데 나중에 검색해보니 기소가 안 됐더라. 취재해봤더니 당시 피해자 할아버지는 그 지역 유지여서 경찰서에서 다 아는 사람이었고, 이후 경찰 조사에 따르면 주먹질·발길질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폭행은 노인이 한발 물러서며 합의금 없이 합의가 됐고, 흉기협박죄도 무혐의로 끝났다.” 그는 진실과 사실이 아니라 “이슈를 욕망”한 매체들을 비판했다. “최민수 아니라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순식간에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 게 (인터넷 포털 중심으로 뉴스 소비 행태가 재편되면서 강화된) 인터넷 언론”이라는 사실과, 한 사람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그를 아껴야 했고 나중에라도 명예 복원을 위해 노력해야 했다고 말했다. 사회부 사건 기자가 아님에도 용산경찰서에서 이틀 밤낮을 취재했다는 그는 “르포를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는 모두 순백의 완전무결한 피해자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피해자가 될 수 없다. 세월호 유족들을 향한 시선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이전에 누구였든 그들은 끔찍한 사고의 피해자이고 그 사실은 변하는 게 아닌데, 한국 특유의 내 편 아니면 저 편, 흑 아니면 백으로 나누는 이분법이 피해자에게도 적용돼 피해자는 순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가 드러나는 사건·사고를 골라 속살을 들여다보고, 르포로 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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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이 출연한 JTBC의 예능 프로그램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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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쫄아, 뒤 봐주는 사람 없으니까
그는 방송에 대해 “양날의 검”이라고 말했다. “기사 백날 써도 안 읽고, 방송 백날 찍어도 방송보다는 방송 정리한 기사를 보는 경우가 많지만, 빈도나 비율적으로 내가 할 말을 좀더 쉽고 간단하게 전달할 수 있다. 대신 쉽고 간단하게밖에 전달을 못한다. 그래서 오해의 소지도 커진다.” 그가 방송을 하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소속사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난 끼가 없다. 소속사에 들어가서 정말 웃겨야 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고 소속사가 하라고 하는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 적게 벌더라도 내가 할 프로그램을 스스로 결정하면서 일하고 싶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 쫄지 않는다. 방송에서 비스듬하게 앉아 팔짱을 끼고 주억거리며 이야기를 듣다가 낄낄대고 웃거나 자기 의견을 툭툭 이야기하는 모습은 한국 방송에서 드문 모습이다. “왜 그렇게 쫄지 않냐”고 묻자 돌아온 답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끌어주고 밀어주는 사람이 없다. 내 대신 해명해주는 사람도 없다. 내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내 앞은 낭떠러지다. 내가 할 때 제대로, 확실히 해야 한다”였다. 허지웅은 여전히 버티며 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함께 버티자고. “마음속에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문장을 한 가지씩 준비해놓고 끝까지 버팁시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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