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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아리랑>을 찍을 당시의 나운규와 <아리랑>의 한 장면(위). 1926년 인쇄매체에 실린 <아리랑>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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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보여준 목록엔 아리랑외에
25년작 ‘암광’ 등 한국영화 상당수 <아리랑>을 가지고 있냐는 호씨의 질문에 아베는 “정리를 안 해서 모르겠는데 하면 나오지 않겠냐”며 십여년전 쯤에 정리해놓은 듯한 한국 영화 필름 목록을 호씨에게 보여줬다. 목록을 본 호씨의 눈이 번쩍 띄였다. 60여편의 목록엔 <아리랑>뿐 아니라 1925년작 <암광>부터 32년작 <임자없는 나룻배> 등 당시 한국영화 대표작들이 망라돼 있는 데 더해, 발표되지 않아 제목을 처음 보는 30~40년대 영화도 상당수 들어있었다.(이 목록에 담긴 영화 가운데 지금 한국에 있는 건, 최근 영상자료원이 중국에서 구해온 <군용열차> 한편 밖에 없다.) 아베는 필름들이 정리가 안 돼 보여주기 힘들며 정리가 되는 대로 남한과 북한에 공평하게 돌려줄 것이라고 했다. 필름 반환엔 아무런 대가도 필요 없으며, 자신은 상속자가 없기 때문에 죽으면 일본 정부가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같은 해인 92년에 호씨는 아베가 한국에 보낸 필름 한통을 받았다. 30년대 후반작으로 추정되는 <인인애(隣人愛)>라는 10분짜리 무성영화였다. 동봉된 아베의 편지엔 “같은 필름을 북한에도 보냈으며 조만간 <모자초(母子草)>라는 필름도 보내주겠다”고 적혀있었으나 다음 필름은 받지 못했다. 이후로 한국의 언론사, 방송국, 영화인들이 여러차례 <아리랑>을 찾아 아베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성과를 보지 못했다.
여기서 추리를 하자면 끝도 없다. 우선 필름 5만권은 전세계 필름 아카이브를 통틀어도 최대 규모에 가까우며 개인의 힘으로 이걸 모으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데, 그렇다면 당시에 상당한 힘을 가진 기관에서 필름을 모았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아베는 결국 이들 필름의 소유자이기보다 ‘침묵의 관리자’였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볼 수 있으나, 지금으로서는 추리에 불과하다. 문화관광부는 현재 일본 문화청과 접촉하면서 수시로 이 문제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있다. 김태훈 영상산업진흥과장은 “아베의 조카가 나타났다는 말이 있어 확인중”이라며 “상속권이 어디에 귀속되는지, 진품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있다면 일본 문화청에 요청해서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오도록 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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