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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7 17:48 수정 : 2005.02.17 17:48



그는 그저 달린다
사소하고 경이로운
순간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초원은 얼마 남지 않은 야생동물의 천국입니다. 이곳에서 초식동물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요. 초원이 중얼거렸을 때 나는 이것이 적확하지 않은 진술이라고 생각했다. 초식동물만이 아니다. 초원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모두 위험하다. 얼룩말을 먹고 사는 사자 또한 절대강자가 아니다. 그들은 저희끼리 싸운다. 서열을 가려야 하기 때문이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교육받고 자랐다. 달려라, 더 빨리 달려라, 끝까지 달려라. 레이스의 진짜 경쟁자는 너 자신이니 너는 너를 이겨야만 한다! 고등학교 때 우리 반 급훈은 정말로 ‘극기(克己)’였고,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일 할 일이 ‘말아톤’ 이라고 또박또박 일기장에 쓰는 청년 초원은 자폐증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달린다. 달리기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무서워하는지 행복해하는지는 그의 어머니조차 모른다. 그는 그저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마라톤 풀코스의 세 시간 내 완주라는 그의 어머니가 세운 목표에 대해 코치는 “미친 짓이에요”라고 일축한다. 특수학교의 교장선생은 “그래서 뭐가 달라지나요?” 라고 말한다. 우리는 안다. 그것은 이미 규격화한 틀 안의 ‘정상적인 목표’ 이며, ‘정상인과 다른’ 초원이 그 목표를 이룬다고 해서 장애를 포함한 그의 인생이 갑자기 장밋빛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초원이 만류하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홀로 달리는 장면을 보면서 이 편견은 서서히 흔들린다. 우리가 마라토너의 초인적인 인내력에 감탄하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인간의 위대함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동안, 초원은 달리기의 ‘순간을 느끼고’ 있었다.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순간, 비가 주룩주룩 마른 땅을 적시는 순간, 터질 것처럼 가슴이 벌떡벌떡 뛰는 순간. 그 사소하고 경이로운 찰나들을 온몸으로 받아들면서 그는 달리고 있었다.

소설 한 편을 쓸 때마다 백번도 넘게 자문하곤 한다. 과연 완성할 수 있을까,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을까.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나는 왜 소설을 쓰는 것일까. 그의 앞에 놓인 수많은 42.195km를 생각한다. 다음 레이스에서 완주하지 못할지라도, 스스로의 기록을 깨뜨리지 못할지라도, 달리는 길의 하늘과 바람과 별을 발바닥에 새길 수 있다면 그는 진짜 마라토너다. 초원에게 그리고 나에게, 김민기의 ‘봉우리’를 바친다.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 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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