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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26 00:51 수정 : 2006.06.26 00:51

2001년이니까. 5년 전. 이맘때였다. 아네스 자우이라는 생소한 감독의 프랑스 영화가 개봉됐다. 타인의 취향(Le Gout Des Autres / The Taste Of Others, 프랑스, 1999). 많은 이들이 재미있다고 꼭 보라고 했다. 난 그때 이렇게 반문했다. 타인의 취향? 그런게 어딨어? 5년이 지났다. 다시 꺼내 보았다. 우리에게 타인의 취향이 있는가? 다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각기 다른 취향을 가진 여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중소기업 사장인 까스텔라, 그의 부인인 인테리어 코디네이터 앙젤리끄, 카스텔라의 영어교사이자 그가 사랑하게되는 연극배우 끌라라. 그리고, 끌라라의 친구인 바텐더 마니. 까스텔라의 보디가드인 프랑크, 앙젤리크의 운전기사인 브루노.

남자 셋, 여자 셋. 이 여섯 명의 인물은 정치, 연애, 예술에 대해 각자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타인의 취향을 대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감독은 섬세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포착하고 있다.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라 공감이 가고 그 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장면 곳곳에서 웃음이 묻어난다.

중소기업 사장인 까스텔라는 부인인 앙젤리끄에게 무시당하며 살고 있다. 연극이나 그림에 대한 취향이 경박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까스텔라는 앙젤리끄에 이끌려 연극을 보러 갔다가 연극에는 관심 없고 주연 배우인 끌라라에게 반하게 된다. 그때부터, 까스텔라는 끌라라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콧수염도 깎고, 그림도 사 모으고, 연극도 보러 다니면서 노력해보지만 그녀와 주변 사람들의 조롱거리만 될 뿐이다.


사랑 없이는 아무 남자와 잘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끌라라. 하지만, 그녀의 친구인 마니는 남자와는 같이 자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평소에 바텐더로 일하고 생계를 위해서 마약을 팔기도 한다. 그런 그녀를 프랑크는 좋아하지만, 다 좋은데 마약을 판매한다는 사실만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서, 늘 티격태격한다.

앙젤리크는 경박한 인간들의 취향을 받아들이지 못해 동물을 더 좋아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강아지에게 물린 사람에게 강아지에게 해코지를 했으니까 물었지라며 개만도 못한 인간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부정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보며 '위선이나 죄를 모르기 때문에 행복해 보인다'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운전사 브루노가 한마디 한다. '디즈니랜드에나 가보시죠'

이 여섯명의 인물들이 겪게 되는 소소한 감정의 충돌들을 통해서 감독은 모든 사람의 취향은 다르다.라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정치이든, 연애이든, 예술작품이든 사람들의 취향은 다르다. 그리고, 다르기 때문에 늘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그 또한 당연해 보이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감독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 그 취향들을 애써 화해시키려 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 화해나 이해의 방식 역시 다른 취향만큼이나 다양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감독은 그 당연한 사실들 앞에서 타인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면서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까스텔로처럼 타인의 취향에 맞춤으로써 타인과 하나가 되려고 하기도 하고, 마니와 프랑크처럼 어떤 부분에서는 인정하면서도 인정하지 못하는 부분 때문에 각자 다른 취향을 지닌 채 갈등 속에 지내기도 하고, 브루노처럼 어느 취향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며 그냥 자신만의 취향을 키우면서 사는 사람도 있다. 그 반면에 앙젤리크처럼 절대로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취향은 누구나 다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다름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그 해결방식 역시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들을 존중해주면서 살아가면 될 것이라는 사실.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사실들. 그런데 그 사실들이 나에게는 왜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영화의 배경이 프랑스라서?

타인의 취향은 어디까지 존중해줘야 할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자신의 기호를 맘껏 표현하는 정도? 존중하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거나, 그렇게 서로를 존중해주면서 사이좋게 모여서 살 때 그 사회의 구성원 개개인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는 정도는 나 역시 존중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역시 나에게는 왜 이렇게 공허하게 들릴까? 다들 그렇게 잘 지내고 있어서?

타인의 취향? 그런게 어딨어? 라고 반문을 한지 5년이 지났다. 나의 생각에는 크게 변함이 없는 것 같다. 타인의 취향? 자본의 취향이겠지. 다양해 보이는 취향들은 자본의 취향일 뿐이다. 자본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니며, 우리의 취향은 하나가 된다.

우리에게 자본의 취향을 제외한 취향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에 반대하는 취향, 반자본의 취향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다른 취향은 늘 이런 인사를 받는다. 취향이 참 특이하시네요. 모두가 비슷비슷한 자본이 만들어 놓은 취향에 길들여져 있으니, 자신의 취향과 조금만 다르면 특이할 수밖에 없다.

데뷔작인 이 영화로 주목을 받은 아네스 자우이 감독은 작년에 라는 영화로 칸느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에게 이 여성 감독의 취향은 참 특이한 게 아니라 참 소중해 보인다. 영화 만드는데 큰 돈 들인 것같지도 않고, 큰 돈 벌려고 만드는 것 같지도 않다. 그녀가 영화를 왜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영화에 대한 취향은 존중해 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자본이 만들어 낸 취향이 아닌 또 다른 취향이 있는가? 물론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에서, 연애에서, 예술작품에서도 자본에만 예속되지 않는 취향을 가진 이들은 얼마든지 많다. 좀 더 많아 졌으면 좋겠다. 그 때 타인의 취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한 5년 후에..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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