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예의 목적’에서
지난 6월, 월드컵의 광풍, 정확히 얘기하자면 월드컵 응원의 광풍이 지나간 이 땅에는 남은 것도 많다. 한국 축구에 대한 기대와 우려 섞인 전망들, 끝나버린 축제에 대한 아쉬움, 아무도 못 말리는 우국적 집단주의, 또 다시 시청을 붉게 물들였다는 응원문화에 대한 자부심 등이 한국의 16강 탈락이 결정된 뒤에도 연일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며 월드컵이 남긴 것들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평가의 관점일 뿐, 월드컵 기간 중에 한국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한국전의 결과만큼이나 응원 현장의 노출이 심한 의상들이었다. 시청녀니 엘프녀니 하는 말들은 이런 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더운 날씨에, 더구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시원한 옷을 입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의상이 자기표현의 수단인 다음에야 누가 뭐라고 말 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월드컵 응원의 현장에서 성희롱, 성폭력 사건이 적지 않게 발생하였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여성의 노출이 그 원인으로 지적 되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옷차림은 신중하지 못했고, 가해자의 동물적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이런 논리들은 불편하기만 하다. 서구에서는 '데이트 강간'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어 설사 사귀는 사이라도 관계에 있어서는, 일방의 의사에만 의한 것은 강간으로 본다고 하는데, 우리의 문화는 모르는 사이에도 야한 옷만 입으면 성폭력을 유발할 수 있다고 난리니 도대체 어디서 어디까지를 성폭력으로 봐야하는지 모호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땅에서 성폭력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 논의를 위해서 작년에 개봉한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를 밝히고자 한다.
‘연예의 목적’ 만큼이나 많은 논란을 가져온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술 마시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술 마시는 장면이 많기도 하거니와 영화가 보여주는 여러 문제들 때문에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극장을 나서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반드시 정의여야 한다는 것은 환상이라며 불합리한 우리의 현실에 먼저 눈 돌려야 한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이런 엇갈리는 주장들 사이에도 몇 가지 일치하는 인식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극중 이유림(박해일분)의 최홍(강혜정분)에 대한 집요한 애정공세가 성폭행이며 수학여행 중의 일방적 성관계는 강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한 일차적 동의가 될 것이다.
이것이 성폭행이 아니고, 강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왜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았나?’를 이유로 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혹은 우리의 영화는 강간에 대한 지나친 관대함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관계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몸부림치며 적극적으로 반항해야만 강간이 성립된다는 식이다. 처음에는 거부의 뜻을 분명히 했으나 이내 지치거나 힘에 눌려 거부의 동작을 멈추는 경우, ‘자기도 좋으면서~’라고 음흉한 오해를 하고, 이것을 관계에 대한 동의라고 쉽게 판단한다. 하지만 이것도 명백히 강간이다. 아마 일부 성폭행 범죄자들도 범죄의 순간,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는 상대를 보며 동의를 얻은 성관계라고 착각하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보고도 강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들도 예비 범죄자일 수 있을 것이다. 강간인줄 모르고 하고, 당하면서도 모르는 것이 우리의 성풍속도인가, 하지만 누군가는 이 무지의 합의 속에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관대하게 생각하고 남성위주로 판단하던 ‘성폭력의 기준’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성폭력을 판단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원칙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입장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거부에 대한 능동성 보다는 성관계에 대한 능동적 동의의 여부가 그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다시 영화에 대한 얘기로 돌아와서 보면, 전반부 이유림이 최홍에게 한 행위들은 최홍의 능동적 동의가 결여된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명백한 성폭력이고 강간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모든 논란은 영화 전반부의 성폭행의 전과들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옳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고민은 ‘연예의 목적’보다 ‘강간의 목적’에서 출발 할 수 있다.
연애의 목적, 전반부 - 강간의 목적
앞서 영화에 대한 엇갈리는 인식이 존재함을 말하고 나서 이렇게 영화의 제목을 바꿔 부르는 것은 한쪽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얘기하기 위함은 아니다. 나중에 밝히겠지만 이 영화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영화 속 주인공이 강간을 감행할 뿐, 이 영화가 강간범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영화는 수학여행을 기점으로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전반부는 한 남성이 성적 욕망과 호기심으로 자신에 비해 사회적 약자인 한 여성을 유린하고 결국 강제로 관계를 맺는 이야기이다. 약혼자가 있음에도, 그의 집착과 언어폭력, 지위를 이용한 협박, 회식자리에서의 행태 등은 전형적인 직장 내 성폭력의 모습이다. 유명배우의 얼굴만 아니라면 ‘직장 내 성폭력 백태’라는 제목의 교육용 비디오로 출시가 가능할 정도이다. 분명 이유림은 비겁하게 자신의 작은 권력을 이용하여 최홍에게 접근, 희롱, 폭행, 강간하는 범죄자이다. 여기에 이견이 있을 수는 없다. 사실은 사랑 이었어 라고 정당화 하거나 멜로 영화의 문법을 전복하고 새로운 연애를 보여준다고 감탄하거나, 솔직한 연애담 이라며 성적으로 개방된 요즘 사람들의 기호를 반영한다고 분석하는 것들은 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보지 못한, 혹은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생각이다. 무심코 던진 농담도 어떤 이들에게는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하물며 이렇게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은 아무리 호감이 있었던 사람이라도 용서할 수 없는 문제이다. 최홍은 신고를 서둘러야 했다. 이유림은 다른 대상에게도 얼마든지 같은 범죄를 되풀이 할 수 있는 악질이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그렇다.
연애의 목적, 중반부 - 사회라는 또 다른 가해자
하지만 중반 이후 이유림을 파렴치한 강간범으로만 모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단지 그의 ‘연애의 목적’이 마음에 드는 상대와 거리낌 없이 즐기고, 즐거워지는 것일 뿐이다. 반면에 최홍의 ‘연애의 목적’은 상처의 치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이 엇갈리는 목적들을 어떻게 조정해 나갈까? 영화는 여기서부터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이유림과 최홍의 관계가 원만할리 없다. 이들의 관계는 여전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이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단서가 붙을 수 있다. ‘사적’인 가해자와 ‘사적’인 피해자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대중에게 공개되어 보여 지는 상업영화인 만큼 이 문제를 사적 영역으로 묶어 둘 수는 없다. 다만 앞으로 전개 될 내용에 비해 ‘사적’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중반부에 최홍에게는 이유림의 가해보다 더 지독한 가해의 상처가 있었음이 밝혀진다. 여기서 그녀의 과거 상처가 성폭행보다 더 가혹하다는 것은 결국 극중 최홍의 판단이다.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회적으로 매장해서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던 어떤 남자로부터의 상처 때문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한다. 지금 만나는 남자 친구는 그녀의 상처를, 그로 인한 불면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그녀의 현재 애인은 그 상처를 알지 못한다. 그녀는 그녀의 아파트만큼이나 철저히 고립되고 외로운 날을 보낸다. 적어도 영화에서 그녀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유림의 행동보다 과거의 상처이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서 이유림에 의한 성폭력이라는 극단적인 장치를 동원하여 사회적 폭력이 개인에 의한 폭력보다(비록 그것이 성폭행일지라도!) 얼마나 더 잔혹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이유림의 집요한 관심과 접근이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고립된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최홍은 이유림과 같이 자면서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다. 그리고 그 둘은 비로소 연애의 목적을 고민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
즉 사회라는 거대한 폭력에 노출되었던 한 여성이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적인 접근을 통해 만난 한 남자를 통해 그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영화는 그리고 있다. 이것은 결국 한 여성이 받은 상처의 치유와, 그것을 통한 성장을 잔혹하리만치 극단적인 비유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폭력은 사적인 범위를 넘어서, 사회에 의해 혹은 그 안에 속한 우리에 의해 진행되는 거대한 폭력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정의를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누구나 안다. 타의에 의해서 이런 관계에서 배제되고 고립되는 것만큼이나 가혹한 폭력은 없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영화는 다소 위험한 비유를 들고 있다. 하지만 그 표현의 옳고 그름이 여전히 문제로 남을지라도 우리가 이 거대한 사회적 폭력에 혹시 가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우리는 빈곤을 이유로, 학력을 이유로, 피부색을 이유로, 정치적 입장을 이유로, 성적 정체성을 이유로, 보이지 않는 계급을 이유로, 편견을 이유로, 다른 여러 가지 차이를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폭력에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가.
연애의 목적, 후반부 - 그리고 결말
영화의 후반부, 또다시 치 떨리는 사회적 폭력 앞에 노출된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당했던 예전의 그녀와는 다르게 그 폭력 앞에 당당히 맞선다. 그리고 자신을 오랜 세월 불면에 시달리게 한 상처를 거부한다. 이유림을 성폭행 혐의로 고발하는 것은 전반부에 끊임없이 진행된 그의 성폭행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 사회적 폭력에 노출된 스스로를 방어하고 그 상처를 이유림에게 전이하기 위한 행동이다. 희생양은 있을 것이나, 중요한 것은 그녀의 상처가 치유되고, 또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폭력에 관한 영화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의 성별이 무엇일지라도 언제나 우리를 위협하는 사회적 폭력에 관한 영화이다. 하지만 분명 이 영화는 연애의 목적을 말하고 있다. 이 거대한 사회적 폭력 앞에 끝까지 자신을 믿어 줄 사람을 찾는 것이 연애의 목적이라는 것을 영화의 결말은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성폭행이 인정되어 파면되고 학원을 전전하며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이유림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것은 결국 최홍이다. 해피엔딩을 위한 상업적 타협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는 없지만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신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연애의 목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려는 남는다.
영화 ‘연애의 목적’은 결국 사회적 폭력의 잔혹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성폭력이라는 위험한 비교 대상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더라도 여기에 표현된 성폭행은 인정될 수 없고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따라서 이 영화의 존재도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마치 영화가 성폭력을 정당화 한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하게 우려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결국 답은 없다. 영화를 보는 사람의 인격을 믿을 뿐이다.
이 영화에 대한 논란과 흥행은 여러 매체를 통해서 그 영향력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거세된 채, 영화에서 비춰지는 성적 솔직함만이 차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드라마에서도 심심치 않게 인용되듯, 이 땅의 마초들이 ‘한 번 자죠.’라고 어렵지 않게 말하고 성적인 농담을 심심치 않게 입에 담고, 약간의 호의나 응대가 동침에 대한 동의라도 되는 듯 달려들게 된다면 분명 이 영화에 책임을 묻고 싶어질 것이다. 제발 자제를 부탁드린다. 영화는 무죄일지라도 당신들은 유죄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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