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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의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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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보다도 자유가 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자존감이 빵으로부터 오지 않고 자유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자유는 침해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가치이다. 양심과 선택, 표현은 모두 한 개인의 고유한 가치인 자존권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것들이 침해된다면 한 인간의 천부적 권리는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인류가 끊임 없이 추구해온 인권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한 나라의 자존감은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확립된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자신의 나라의 운명은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그것을 대신해 줄 그 어떤 나라도 용납될 수는 없다. 특별히 한 민족의 통일과 같은 우리 사회의 절대적 과제는 더욱 더 그렇다. 이미 외세의 개입으로 이산과 전쟁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통일만큼은 우리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야 하는 것보다 더 중대한 과제는 없다. 따라서 통일이야 말로 빵보다도 더 중요한 사회적 과업임에 틀림없다. 실용적 애국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문제를 위해 6자 회담을 해야 하고, 미국과의 FTA, 일본과의 적당한 협정을 맺어야만 하는 오늘의 국제 정세는 빵을 무시할 수 없는 국제 질서의 야속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상현(차인표 분)과 같은 이 땅의 엘리트들이 신자유주의의 질서에 편승해 나라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것이리라.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하는 신념으로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대통령(안성기 분)과 국제 질서에 따라 국가의 이익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국무총리(문성근 분), 이 두 애국주의와 현실주의의 사이에 서서 무엇이 더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국정원 서기관(차인표 분)의 역할은 무엇으로 규정해야 할까? 실용적 애국주의(pragmatic patriotism)이라고 해야 하나? 정치권에서는 자주 쓰는 용어 중 하나이긴 한데 이 표현, 즉 ‘실용적’이라는 용어가 어울리는 단어일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 땅의 국민 대다수는 바로 이런 입장에 서 있을 것이다. 지나친 애국주의를 적당히 비평하면서도 의식 없는 현실주의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정신으로 역사와 민족이라는 대한민국사(史)의 화두를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게 바로 우리 국민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교훈이 한 가지 있다. 실용적 애국주의(그냥 그 표현이 가장 어울릴 것 같아서 계속 사용한다. 이 표현에 사족을 달지 않기를...)는 비난받을 수 없는 대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독제는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가치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잠재력일 뿐이다. 영화에서 이상현은 자신의 선배 최민재(조재현 분) 박사의 의지를 통해 현실을 재조명함으로써 무엇이 옳은 길인지를 깨닫게 된다. 실용적 애국주의의 길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진실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킨 것은 바로 최민재의 신념이었다. 결국 대한민국 현대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동력은 바른 역사의식과 민족적 자존감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대다수의 정신 속에 숨어 있는 진실담론의 의지를 일깨울 때 <한반도>와 같은 통쾌한(?) 결론이 우리 사회에서도 현실화 될 수 있다. 결국 애국주의로 돌아가는 환원론이 아니냐고 또 다시 따지고 들면, 강우석이나 나나 별로 할 말은 없다. 똑 같은 영화, 똑 같은 칼럼을 쓸 수밖에... 아 하! 그래서 역사를 바로세우자고 하기만 하면 여전히 찬반양론으로 맞서서 팽팽한 샅바싸움만 벌이고 있는 거겠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더라도 그 논쟁의 현장에 서서 계속 지켜보아야겠다. 아니! 그럼 안 되지! 고래가 되어 나도 피터지게 싸워 볼까나...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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