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21 20:22
수정 : 2006.08.21 20:22
〈예의없는 것들〉은 두서를 잡기 힘든 영화다. 고아에, 혀가 무척 짧아 아예 말하기를 포기해버린 한 바닥 인생(신하균)이 살인청부업자가 됐다. 일본 가서 혀수술 할 비용을 마련할 때까지만 살인 청부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의뢰받은 건수 가운데서도 죽여도 될 만큼 악당인(이 영화식 표현으로 ‘예의 없는’) 이들만 골라서 일을 맡는다. 그의 독백이 계속 흐르는 이 영화는 한 킬러의 실존적 고백 같은 형식을 빌려, 비정한 세계를 비추는 전형적인 누아르로 갈 것 같다. 그런데 아직 누아르를 요구하는 상황이 설정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말해 세상이 별반 비정해지지도 않았는데, 개그와 과장과 비약이 심하다.
주인공은 스페인에 가서 투우사가 되겠다는 낭만적인 꿈을 꾸고, 주인공 주변을 감싸는 건 언제 죽거나 잡힐지 모르는 긴박감이 아니라, 나른한 삼류 인생의 일상이다. 그 일상을 지내면서 주인공은 초반부터 사건을 수임받아 사람을 죽이는 일만 빼고 나머지는 자신이 주체가 되기보다, 난데없어 보이는 타인이나, 웃기는 상황이 빚어낸 우연에 끌려다니는 수동적 인물이 된다. 자주 가는 카페의 여종업원(윤지혜)이 스스로 먼저 취해 느닷없이 주인공에게 키스를 해댄다. 그게 습관처럼 돼 카페에 가는 날마다 같은 일이 생기고 급기야 이 여종업원은 주인공 혼자 사는 집에까지 쳐들어온다. 섹스도 여종업원이 주도한다. 여자 혼자 토라지고 울고 다시 기운 내고 하면서 주인공 집에 ‘다시는 안 온다’ 하더니 애인처럼 수시로 찾아온다.
말 못하는 주인공은 계속 침묵하고 여자 혼자 감정선이 극에서 극을 달릴 때, 영화는 주인공의 짧고 담담한 독백으로 그의 심경을 잠깐씩 들려준다. 독백은 가끔 함축미를 지니면서도, 대체로 초점이 빗나간다. 그 썰렁한 풍경에서 조금씩 유머가 쌓인다. 이따금씩 이 바닥 인생들 사이에 로맨스의 싹이 틀 수 있을지 연민 어린 관심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주인공은 또 사람 죽이러 간다. 이 기묘한 부조화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려고 할 즈음에 영화는 정반대쪽으로 분위기를 바꾼다. 주인공 외의 인물들이 가세해 살인이 잦아지고, 그 장면이 잔인해진다. 그와 동시에 주인공의 과거사와 여자의 과거사가, 전형적 구도 아래 펼쳐지면서 뒤늦게 신파적 누아르와 멜로로 후반부를 지루할 만치 늘려놓는다.
새로운 스타일의 코믹 누아르처럼 시작하다가 그게 제 맛을 드러내기도 전에 갑자기 지겹도록 보아온 조폭 멜로로 달려가는, 이 어지러운 방향전환이 영화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다. 그 두서없음에 파묻혀 버리기 쉬워 보이지만 주인공과 여자(뒤에 가세하는 꼬마아이까지 합해)가 빚어내는 유사가족적 공간에서의 유머와 애환은 신선하다. 이장호, 장선우 감독의 연출부 출신인 박철희 감독의 데뷔작이다. 24일 개봉.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사진 튜브픽처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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