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23 21:13
수정 : 2006.08.23 21:13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인 〈나인 라이브즈〉는 세계적인 문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들인 로드리고 가르시아가 감독한 영화다.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2000년 소리 없이 개봉했던 그의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그녀를…〉과 〈나인 라이브즈〉는 여러 모로 닮았다. 여러 명의 여자들이 등장하며 그들의 일상이 분절된 에피소드처럼 이어진다. 〈나인 라이브즈〉는 전작보다 한발 더 나아가 여자 아홉명의 이야기를 아예 독립시켰다. 또 카메라가 담는 그들의 삶은 더 순간적이고 분절적이라 마치 삶의 한순간, 카메라가 없었더라면 누구에게나 잊혀졌을 순간을 포착한 스틸사진 같다. 그 사진을 보고 남들은 ‘네가 그때 아팠지’ ‘거기에 갔었구나’ 하는 식으로 건조하게 말하겠지만 본인에게는 그 순간 마음속을 헤집던 수만가지 감정이 울컥 터져나오게 만드는 사진들.
각각의 에피소드에는 홀리, 다이애나 등 주인공 이름이 제목 대신 붙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아니라 다만 ‘그녀’들을 응시해 달라는 감독의 주문 같다.
두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 다이애나(로빈 라이트 펜)는 대형마트에서 시장을 보다가 5년 전 헤어진 옛 연인 데미안을 만난다. 서로 다른 이와 결혼해 사는 둘은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그러다가 데미안이 둘이 가졌던 시간을 상기하자 다이애나는 복잡한 심경에 빠졌다가 결국 언성을 높이며 돌아서게 된다. 격한 감정 속에서 흔들리다가 다시 돌아서 데미안을 찾지만 그는 벌써 떠나버렸다.
‘루스’ 편에서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지친 중년 여성 루스(시시 스페이섹)는 밝고 유쾌한 남자 헨리와 은밀한 만남을 가지게 된다. 함께 간 교외 모텔에서 헨리가 잠시 밖에 나간 사이 루스는 옆방에서 경찰에 체포되는 한 여성을 본다. 여성이 끌려나간 방에 자신도 모르게 들어간 그는 경황없이 나가다가 흘리고 간 여자의 구두를 가져와 오래 응시한다.
사실 짧은 에피소드들을 요약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다. 〈그녀를…〉이 깊은 인상을 남긴 건 등장인물들의 아득하고 쓸쓸한 눈빛이었듯이 이 영화에서도 무언가 말하는 건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들의 흔들리는 표정이고 분노와 혼란, 슬픔 등을 담고 있는 눈빛이다.
불현듯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자신의 과거 옆에서 다이애나는 현실의 서걱거리는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고 순간 옛 연인도 지금 남편의 아이를 가진 자신도 낯설어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또 루스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여자의 닳은 구두축을 보며 그것처럼 고단하며 말 못할 비밀을 지닌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았을까.
〈나인 라이브즈〉는 마치 종이에 손가락이 베듯 가슴 한구석을 아프게 찌르는 삶의 정지된 한순간을 부드럽게 담아낸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는 감독의 솜씨가 너무나 섬세해 안정된 장년 가장의 전형적인 얼굴을 한 그의 모습과 작품이 도무지 하나로 연결되지 않을 정도다.
홀리 헌터, 글렌 클로즈 등 〈그녀를…〉에서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이 다시 출연했다. 이 영화에 출연한 14명의 여배우들은 지난해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했다. 24일 개봉.
김은형 기자
사진 동숭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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