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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관람기
며칠 전까지 당연스레 입고 있던 민소매 옷이 문득 철이 지났음을 느끼는 초가을이다. 매번 '올 때가 됐구나' 하고 눈치를 챌 쯤엔 이미 온 세상이 가을에 함락 당하기 직전이다. 찬바람에 콧물을 찔끔거리면서도 가을 기운이 듬뿍 담긴 새벽 바람을 마시고 싶었다. 한간의 무기력함에 두통마저 느껴지던 차에 이 모든 이유에서 조조영화를 보기로 했다. 아침 여덟 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영화관에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 버스나 자가용으로 수십 번은 오간 길이니 별 어려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상쾌한 마음으로 동네를 벗어나서 광안리 해변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30분쯤 달리다 보니 '이 길이 아닌데' 싶었다. 평소 자가용으로 가던 길을 곰곰히 떠올려보니 반대 방향으로 왔음을 알아차렸다. 돌아서 다시 가기엔 꽤 멀리 왔고 할 수 없이 끙끙거리며 자전거를 들고는 지하철을 탔다. 인생이 생각처럼 낭만적이지 않음을 또한번 느끼면서. 이래저래 헤매다 도착했으나 영화 상영 20분 전. 10시 20분 조조영화를 예약하고 주차할 곳을 물어보니 데스크의 직원이 "자전거는 글쎄요" 하며 웃는다. 자전거도 차니까 주차장에 댈 수밖에. 4층으로 다시 내려가 난관 한켠에 열쇠를 감아 묶고 올라와 입장 시각을 기다렸다. '천하장사 마돈나'. '천하장사 마라도나였음 이상했겠군'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주인공은 마룻바닥에 엄마의 화장품 상자를 어질어 놓고 그 결과물로 빨간 입술을 하고선 마돈나의 'Like a Virgin'을 듣고 있는 다섯 살쯤의 꼬마 아이.아이는 자라서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이 되어 있다. '하고싶다(혹은 되고싶다)'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마치 한쌍의 자물통과 열쇠처럼 모든 기운을 쏟아넣을 수록 확고한 그 무언가가 영혼을 사로잡는, 진정으로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그것은. 하고 싶은 게 많은 친구, 종찬이. 간절히 단 하나를 바라는 동구. 나는 그 두 소년이 다 좋았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알아갈수록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는 꿈을 꾸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른이 되면서 하고 싶었던 것을 포기하거나 잊어버리곤 한다. 동구의 엄마는 어렵사리 아들의 진심을 받아들이며 멋진 말을 했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멋지게 사는 거, 그게 진짜야." 어려운 길을 가고자 하는 자식을 아픈 마음으로 응원하는 어머니의 마음 앞에 눈물이 났다. 한때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산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성공이란 걸 움켜쥐는 게 인생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는 나이 서른이 되서야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깨닫고, 누군가는 평생 그것을 모르기도 하며, 또 누군가는 하염없이 원하고 노력하고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게 인생이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설레여서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내겐 애초부터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 남자가 되고 싶은 여자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동구와 종찬이가 좋은 건 그저 하고싶은 걸 위해 열심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그들처럼 순수하지 못하다는 자각에 영화를 보면서 울고 웃었다. 사랑을 하고 있어도 눈물 나는 계절이다. 추풍(秋風)이 가슴을 밖에서도 적시고, 안에서도 소용돌이 친다. 내 중심을 지키면서 상대방의 중심을 뺐는 것이 씨름의 기술이라면 사랑의 기술은 내 중심마저도 뽑혀져 흔들리는 것이 진짜인지, 그 역시 같은 이치인지 툭하면 이어지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영화관 밖으로 나왔다. 정오를 막 넘긴 시각. 가을이라한들 쉬이 자리를 내줄 순 없다는 듯 따가워진 한낮의 땡볕을 온 몸으로 받으며 한 시간을 달려 집으로 왔다. 동구는 그 후로 행복해졌을까? 나는 지금 행복한 것일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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