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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02 14:03 수정 : 2006.10.02 14:32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간밤에 읽은 <맑고 향기롭게>라는 책에서 법정스님은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란 자신의 그릇에 맞게 버리고 비우는 것으로, 그것은 미덕이며 지혜로운 삶이라 했다. 남들 바삐 일하는 시간에 천천히 하늘 보고 땅 걷는 특권을 누리다보니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은 당연지사다.

며칠째 햇빛 날 땐 책을 읽고 해가 지면 가을바람 다니는 길로 달리기를 하며 지냈는데 신선놀음도 여러 날 하니 무료해졌다. 그래서 느슨해진 감성을 손쉽게 격정으로 몰고 갈 영화 한편을 꼽아보니 두 선남선녀의 열연에 눈물을 쏙 뺀다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조조영화다. 각종 카드 혜택이 사라졌으니 저렴한 문화생활의 첩경은 부지런함에 있다. 그러나 부지런한들 철저한 준비성이 없다면 식비에 교통비까지 굳은 돈의 몇 배를 소비하는 누를 범할 수 있다.

영화관의 비싼 먹거리를 대신하여 삶은 달걀 두 개와 요구르트를 챙기고 자투리 시간을 할애할 한권의 책까지 준비했다. 그리고 교통비 절감은 물론 다이어트 효과까지 노려 왼쪽 핸들에 준비물을 장착한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극장까지 왕복 두 시간을 달렸다.

“우행시가 사람 이름이에요?” 하며 뒷북을 치고 있을 때 영화에 관한 정보와 평가가 이미 온오프 지면을 가득 채웠다. 그 덕분에 줄거리도 대충은 알고 영화계 대표급 미남미녀 배우가 사형수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주제로 대놓고 눈물 연기를 한다니 안 봐도 감이 오는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노력을 들여 ‘우·행·시’를 선택한 것은 다만 울고 싶어서였다. 심도있는 사색이나 극적 반전에 의한 아찔함 없이 그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예상한 부분에서 눈물을 쏙 빼주기를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행·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여기저기서 본인보다 앞서 훌쩍거리는 소리에 김이 새기도 하고 비슷한 캐릭터로 너무 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조연들로 감정이 흐트러지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눈물이 볼을 타고 목까지 줄줄 흘러내리도록 원없이 울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극중 인물들의 삶에 그들 자신이 슬퍼한 만큼 동조한 것도 아니었다. 어릴 적 상처로 인해 세 번의 자살을 시도했다는 유정의 사연도, 날 때부터 타고난 가난을 견디다 못해 범죄에 가담하고 스스로 누명을 덮어쓴 윤수의 사연도 영화의 시각처럼 그리 불쌍하지 않았다.


언제나 영화보다 더 슬픈 건 현실이니까. 영화가 현실과 다르다고 하지만 그 말은 현실이 영화보다 훨씬 비상식적이고 스펙터클하다는 면에서는 진실이고, 영화의 모든 소재가 삶에서 출발한다는 면에서는 거짓이다. 주인공은 항상 현실에 있다.

윤수와 유정이 공유하고 있는 팔목의 상처를 나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슬픔은 이미 지나간 것이며 돌이켜보면 그리 합당한 흔적도 아니다. 현실은 사형수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아닐지라도 울고 싶은 일이, 울어야 할 이유가 훨씬 많다. 그래서 나는 사실 영화와 아무런 상관없이 다만 원하는 바대로 엉엉 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과감히 잎사귀를 떨구고 겨울을 맞는 나무처럼 사람의 슬픔도 어느 시점에서 훌훌 떨쳐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봄을 맞을 수 있다. 눈물을 쏙 뽑은 뒤 요구르트와 함께 먹는 달걀 맛이 일품이었다. 소박함이 곁들여진 나만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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