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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16 20:21 수정 : 2006.11.16 13:26

재일동포 2세 양영희씨

일본의 부모님·평양의 오빠들
홀로 남한 국적 택한 막내딸
11년 동안 담은 가족사연 다큐로
다음달 한국에서도 개봉

다큐 ‘디어 평양’ 양영희 재일동포 2세 감독

재일동포 2세 양영희(41)씨 가족의 국적과 거주지는 복잡하다. 오사카에 사는 부모님 국적은 북한이다. 세 오빠 역시 국적이 북한인데, 71년 북한의 ‘귀국사업’에 따라 평양으로 건너가 35년 동안 그곳에서 살고 있다. 막내딸인 양씨만 2년 전 북한에서 남한으로 국적을 바꾸고 도쿄에서 산다. 양씨는 일본과 평양을 오가며 이렇게 되기까지의 사연 많은 가족사를 장편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에 담아 지난 8월 일본에서 개봉했고, 오는 11월 한국에서도 개봉할 예정이다. 이 작품에 이어 양씨가 평양에 사는 조카에 초점을 맞춰 만들려고 하는 다큐멘터리 〈선아 또 하나의 나〉(가제)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해외 동포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지원하는 펀드에 선발됐다.

지난 15일 부산에서 만난 양씨가 들려준 그의 가족사, 개인사엔 지구화 시대의 분단 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과 아이러니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양씨의 아버지 양공선씨는 15살이던 1942년, 고향인 제주도에서 형제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해방 뒤 돌아오려 했지만 4·3 사태가 벌어진 그곳에서 어머니가 오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북한 국적을 택하고 총련의 핵심 간부가 됐고, 세 오빠는 양씨가 6살 되던 해에 평양으로 떠났다. “니가타항에서 사람들이 귀국선을 환송할 때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노래를 부르고 색종이가 날리고 ‘만세’를 외치고. 오빠들은 내가 느끼는 것보다 먼 데로 가는 것 같았다.”

양씨는 11년이 지나 고등학생 때 평양에 가서 오빠를 만났다. “서먹서먹하고 무슨 말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주 단순한 얘기밖에 나누질 못했다. 면회시간도 짧았고.” 그 뒤로 여러차례 평양에 가면서 오빠들과는 충분히 이야기하게 됐지만 총련계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면서 양씨의 마음 속에선 회의가 커갔다. ‘졸업하면 총련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학교 방침에 따라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오사카 조선고등학교 교사로 3년을 지낸 뒤 “난 다 했다, 이젠 내 선택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웨이트리스를 하면서 전부터 꿈꾸던 연극활동을 했다. 서른살이 되면서 국적을 바꿀 생각을 해봤지만, ‘죽어도 용서 못한다’는 아버지의 반대가 완강했다.

현실에 벽들이 많았기 때문일까. 양씨는 서른을 넘기면서 픽션보다 논픽션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비디오카메라로 가족들을 찍을 땐 기록으로 남겨두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영화제 다녀온 뒤 이걸로도 작품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를 배우기 위해 34살에 뉴욕으로 유학갔다. “재일동포가 북한 국적을 가지고 미국 유학을 가는 게 까다롭긴 해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하지만 부시가 집권한 뒤부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뉴욕에서 9·11 사태를 맞았던 양씨의 회고는 서글프다. “생각해보니까 사고를 당하면 도움을 청할 대사관이 없었다. 유엔사무국에 근무하는 북한 직원을 만났는데, (북한 국적의) 조선인이 미국에 올 수 있냐고 묻더라.”

세월과 함께 세상이 바뀌면서 아버지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졌다. “전에는 우리집 딸이 어떻게 미 제국주의자에게 가냐고 하시더니 ‘나도 뉴욕 가볼까’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 못 들어와요’라고 했다.” 마침내 아버지의 승낙 아래 양씨는 2004년 남한으로 국적을 바꿨다. 95년 평양의 오빠들을 찾았을 때부터 아버지가 병상에 누운 2005년까지를 카메라에 담은 〈디어 평양〉엔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그래서 심금을 울리는 가족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올해 베를린영화제 넷팩상, 미국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앞으로도 2~3년에 한번씩 평양에 갈 생각인데 북한 경제가 워낙 안 좋아서 걱정이다. 전에는 부모님이 여러가지 물품을 보내줬는데 이젠 내가 해야 할 것 같고. 빈 손으로 갈 수는 없고.” 최근엔 더 큰 벽이 생겼다. 북핵 사태 이후로 평양을 왕래하는 만경봉호의 일본 입항이 금지됐다. 북핵 사태에 이르자 양씨는 말을 아꼈다.


부산/임범 기자 isman@hani.co.kr, 사진 프리비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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