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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 순간
여기 금융시장에서 순식간에 몇백만달러씩 벌어대는 잘나가는 펀드 매니저인 영국 남자가 있다. 세상 모든 것을 돈으로 판단하는 그에게 뜻밖의 소식이 온다.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준 삼촌이 세상을 떠나면서 삼촌 소유의 프랑스 와인농장을 그가 물려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잊고 살았던 유년기를 떠올리며 남자는 프랑스로 떠난다. 어린 시절 그대로인 농장에는 삼촌과 함께 평생 와인을 빚으며 살아온 식구같은 고용인들이 있고, 예상 이상으로 형편없는 삼촌표 와인이 있다. 농장 경영에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없는 남자는 하루라도 빨리 농장을 팔아치우기로 결정한다. 그런던 도중 남자는 운전을 하다 한눈을 팔아 자전거를 타고 가던 어떤 여자를 칠 뻔 한다. 이 바람에 길아래로 떨어져 나뒹굴었던 여자는 얼마 뒤 포도농장 부근을 지나다 자신을 넘어뜨린 차를 몰던 ‘나쁜 놈’이 물 빠진 수영장 안으로 떨어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구해달라는 남자에게 여자는 사다리 대신 풀장에 물을 틀어 주는 것으로 복수를 한다. 며칠 뒤 남자는 여자를 카페에서 발견하고 따지려드는데, 이 여자 거침없이 치마를 들고선 엉덩이에 든 멍을 보여주며 쏘아붙인다. 그 순간, 남자는 톡 쏘는 이 여자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인 영화가 여기까지 진행되면 그 다음 이야기가 관객들이 예상하는대로 흘러가게 될 것은 거의 당연지사다. 여자를 전리품이나 욕망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남자는 주변 여자들과는 다른 ‘까칠하고’ 당돌한 프랑스 농촌의 카페 여주인과 사랑에 빠지고, 그 다음은 당연히 빠르고 각박한 도시의 삶에선 얻을 수 없는 느리고 여유로운 전원생활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는 게 정석. 남자가 여자와 결혼해 농장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말고 다른 결말이 있기 힘들다. 뻔한 흐름을 예상하는 것이야말로 로맨틱 코미디의 관습이자 보는 맛이라면, 〈어느 멋진 순간〉은 그런 공식을 다시 한번 복습하는 것이 재미인 영화다. 뜻밖인 것은 이 말랑말랑한 영화가 〈에이리언〉 〈블레이드 러너〉 〈델마와 루이스〉처럼 암울한 묵시록풍의 강하고 어두운 영화를 찍어온 리들리 스콧이 감독이란 사실. 그리고 주연 남자배우가 〈엘에이 컨피덴셜〉과 〈글래디에이터〉에서 거친 짐승같은 남성상을 보여줬던 러셀 크로우란 점이다. 두 사람은 2000년 〈글래디에이터〉의 감독과 주연으로 만났을 때 다음에는 꼭 이 영화를 찍기로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블랙 레인〉에서 일본의 연두빛 차밭을 무대로 핏빛 액션을 보여줬던 리들리 스콧은 이번에는 프랑스 포도밭의 흙빛을 배경에 깔고 그 위에 짙은 포도줏빛 사랑 이야기를 깔끔하게 그렸다. 와인 종주국인 프랑스가 무대이긴해도 감독이 실제 와인 농장을 가지고 있는 미국 사람 리들리 스콧이며 주인공의 국적이 영국으로 설정된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와인을 빚어낸 것은 프랑스지만, 그 프랑스 와인을 가장 열렬히 즐기면서 지금의 프랑스 와인으로 가꿔온 주역은 수백년 동안 최대 고객인 영국이라는 영국식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원래 제목은 ‘어느 멋진 해’란 뜻의 ‘어 굿 이어’(A Good Year)인데, 와인 용어로는 ‘최고의 포도품종이 생산되는 빈티지(연도)’란 의미라고 한다. 16일 개봉.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사진 20세기폭스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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