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미로비전
|
<사일런트 힐>은 게임을 원작으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작게임에는 영화와는 다른 배경이 있을 것이고, 게임마니아들의 글을 읽어보면 영화보다 게임이 더 재미있다고도 한다. 여하튼 난 <사일런스 힐>게임을 해본 적도 없으므로 영화만을 가지고 생각했던 것들을 한 번 적어보려고 한다.
#1.1974년에는 정말 무슨 일이 났을까?
영화에서 지금은 유령도시가 된 <사일런트 힐>은 1974년의 대화재로 그렇게 되었다고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혹시 <사일런트 힐>에서는 핵사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핵사고가 났었다면 극중 30년이 지났어도 핵물질이 남아있어서 아무도 출입을 못한다. 사실적인 인과관계상 그렇다. 하지만, 이미 사고로 중간세계를 떠도는 모녀와 여경관에게는 핵물질은 상관이 없다.
모녀를 찾는 남편도 현실세계의 <시일런트 힐>로 들어오지만 휴대용 방독면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들어온다. 30년전 대화재의 분진이 그 때까지 남아있을 리는 없고, 핵이나 이상물질에 대한 암시는 아닐까?
그리고, 중간세계 사일런트 힐에는 뿌연 안개속에서 하얀 분진들이 눈처럼 내리고 온몸이 뒤틀리고 녹아내린 '크리쳐'들이 등장한다. 도시 한가운데는 무언가 큰 폭발에 의해선인지 길이 끊기고 주저 앉아있다.
영화의 설정인 1974년도의 대화재는 핵사고의 대응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화재가 컸기로서니 도시 하나의 인구가 몰살하는 것도 이상하고, FBI수사관으로 암시되는 자와 경찰들이 사일런스 힐로의 출입을 마치 무슨 음모라도 있는 것처럼 통제를 하는 것도 그런 의심을 해보게 하였다. 대화재는 명목상의 이유이며 사일런스 힐의 참변은 핵사고이다.
#2.사일런스 힐을 지배하는 사악한 종교가 암시하는 바는?
사일런스 힐의 사교집단은 자세히 보면 기독교계열의 이단집단 정도로 설정이 되어 있다. 그들의 성당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있는데 기독교의 십자가와는 조금 다른 구멍이 숭숭 뚫린 음산한 느낌의 십자가다. 예수 고난과 희생의 상징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교집단은 마녀처형을 하는데 마녀나 악마라고 지명되면 불에 태워서 죄를 정화한다. 마치 중세 유럽 기독교의 마녀사냥이나 미국 KKK단의 "깜둥이처형"을 연상시킨다. 영화의 설정이기는 하지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유럽중세사와 미국사의 암흑기를 현대에서 뒤틀어 낸 패러디라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이렇게 뒤틀어 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가진 제작진의 이단집단에 대한 관점을 반영하는 것인지 한 번 생각을 하게한다. 영화 전체적으로 보수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관철된다는 것을 감안하고, 감히 미국 할리우드 주류영화가 자신이 속한 사회와 국가의 종교성에 도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면 후자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사일런스 힐>의 사교집단이 하는 역할은 미국사회의 기존의 종교관을 강화하는 것이다.
#3. 유사/속류 페미니즘과 성적/인종적 우월주의
미국영화에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많다.<사일런스 힐>도 그렇다. 어머니와 딸 로즈, 미혼모와 화형을 당하는 딸, 여경찰, 여사제 등등. 영화의 주인공과 조연을 하는 주요배역이 거의 다 여자다.
그런데 여자 배우들이 많이 등장한다고 그 영화가 페미니즘의 색채를 띤다고 오해를 하면 정말 곤란하다. <사일런스 힐>의 여자배우들은 철저하게 가학적 새디즘의 대상일 뿐이다. 불에 구워 죽이고, 악마가 찢어 죽이고, 철가시에 찢겨 죽고, 칼에 찔리고, 쇠곤봉에 죽을 때 까지 두들겨 맞고.
성의 상품화가 도착적인 방식에까지 이루어진다. 가만 보면 이런 식의 묘사는 미국 공포영화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눈요깃거리다. 히치콕 시대의 관음증을 넘어서 이제는 몸으로서의 "여성"이 도착적 성 쾌락의 직접적 기제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배경도시 <사일런스 힐>에는 눈을 씻고 봐도 악역으로건 선한 역으로건 유색인종이 등장하지 않는다. 한 컷 정도 흑인하녀가 등장한 것 같다. 마이너리티로서의 여성은 도착적 성 상품화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유색인종은 아예 배제된다.영화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부정적일 수 있는 한 예를 보여준다.
#4. <사일런스 힐>의 재미
<사일런스 힐>에서 눈에 띄는 장점은 두 가지다.하나는 '크리처'라고 불리는 캐릭터들이다. 원작인 게임에서 빌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중간세계로 진입을 하면 등장하는 '크리쳐'들과 악마의 캐릭터는 대단히 독창적인 두려움을 준다.
스물스물 기어드는 공포감만은 높이 사줄만 하다. 안면은 없고 다 녹아내린 창조물들은 지구상의 좌와 우가 다 같이 고민하는 핵과 재난의 피해자들을 상징한다.
둘째는 줄거리인데, 좀 어수선하다는 감이 들지만 비교적 긴밀하고 후반의 반전도 볼만하다.
글을 나가면서
할리우드산의 영화를 보면 두 가지의 양가감정을 느낀다. 재미있으며 그 상상력과 창의력에 경탄을 표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불순한 것들이 눈에 쏙쏙 걸려든다. 할리우드의 영화는 대부분 미국 주류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며 거기에 상업화, 상품화의 테제가 맞물려 있다.
요즘에는 반전/반공해/반핵/반인권/친페미니즘/인종평화와 같은 진보적인 의제를 살짝 다루기도 한다. 그러나 결론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경우도 많다. 단지 소재로만 훑고 지나갔을 뿐 볼거리에 불과하고 영화의 의견과 주장은 오히려 시대의 일반적 추세마저 왜곡하거나 거슬리는 경우도 많다. <사일런스 힐>이 그런 경우이다.
# 헐리우드 영화 단상
헐리우드 상업영화는 그 독보적인 상상력과 창조성에도 불구하고 정말 누군가에게 권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저 사진들을 보라! 저기서 무얼 얻을 것이가? 스틸컷으로 따올 수 없는 사진들은 더한 것도 많다. 역사적으로 "표현의 자유"의 전통이 확립된 이후 그 핑계로 온갖 오물들이 쏟아졌다.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표현의 자유인가? 결국 자본의 증식놀음에 불과하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