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시간 2분, 시선을 낚아채라
<역도산>의 예고편은 설경구의 한 표정을 길게 비춘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중의 환호성 속에 링에 오른 역도산(설경구)은 여유있는 모습을 연출한다. 그러다가 잠깐 고개 숙여 옆을 볼 때 입술 한쪽 끝을 위로 올리며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공공연히 관객을 향해 연출하는 표정들 사이로 짧게 잡히는, 그러나 그의 내면을 드러내는 얼굴. 거기엔 자신감에 더해 관객들에 대한 조롱과 자신에 대한 자조, 협잡꾼의 비열함 같은 느낌까지 많은 게 담겨 있다.
저런 표정은 어디서 나올까. 이 예고편은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이 영화가 평면적인 인간승리의 드라마가 아닐 것임을 예감케 한다. 막상 영화에선 설경구의 이 표정이 말 그대로 스치듯 지나간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에 안 잡힌다. 예고편을 만든 ‘죤앤룩필름’의 채은석 감독은 영화의 가편집본을 7~8번 돌려보면서 이 표정을 잡아챘고 그걸 길게 끌어 예고편의 한 가운데에 앉혔다.
호기심 자극과 내용 전달! 영화의 예고편은 호기심을 자극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반 광고와 같지만 영화의 스토리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고유의 문법을 갖게 된다. 어떻게 하면 90분이 넘는 영화를 2분 안에 최대한 인상 깊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건 단순한 축약을 넘어서는 재창조이기도 하다.
최근의 사례를 보면 수사 검사와 피의자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단 둘이 만나는, 영화엔 나오지 않는 장면을 새로 찍어 함축적이고 긴장 강도가 높은 대사를 주고 받게 한다(<공공의 적 2>). 또, 10·26 사태라는 소재의 무거움을 이면으로 돌린 채 텔레비전 드라마 <수사반장>의 주제곡과 흡사한 음악으로 리듬감을 살리면서 영화 속 장면을 재배치한다(<그때 그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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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분이 넘는 영화의 핵심을 2분안에 녹여넣는 예고편 제작은 단순한 축약을 넘어선 재창조 작업이다. 윤운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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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의 예고편의 발전은 90년대 후반 한국 영화의 비약적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본 영화와 별도로 예고편 제작 업체가 전담하기 시작했고 예고편의 형태도 티저 예고편, 텔레비전 스폿 광고, 컴퓨터 모니터용 온라인 예고편, 본 예고편 등으로 분화됐다. 마케팅이 전문화되면서 예고편은 영화만큼, 아니 영화보다 더 기발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선보이고 있다. 어떨 때는 예고편이 영화보다도 더 민감하게 동시대 대중의 기호를 낚아채기도 한다. 이제 예고편은 음식을 조금 떼내 주는 ‘맛배기’가 아닌, 별개의 맛을 가진 애피타이저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아이디어 경연장’ 예고편 어제와 오늘
호기심 자극 작전
그때그때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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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족한 제작비, 빠듯한 시간으로 예고편을 완성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게 ‘튀는 아이디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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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만 해도 한국 영화의 예고편은 개봉될 영화에 대한 ‘고지’에 불과했다. 조감독이 영화 본 편에 사용되지 않는 엔지 컷을 ‘짜깁기’해 완성하는 것으로 별도의 시간적, 기술적 투자가 없었기 때문에 화질이나 사운드 모두 조악할 수밖에 없었다. 예고편이 ‘광고전단’ 수준의 촌티를 벗어나기 시작한 건 영화에 기획과 마케팅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한 90년대 후반부터다. 물론 최초의 기획영화로 꼽히는 92년작 <결혼 이야기>는 김의석 감독이 직접 예고편용 필름을 따로 찍기도 했지만 이런 일은 예외에 속했다. 영화의 때깔과 짜임새에서 한국 대중 영화의 분수령으로 꼽히는 97년작 <접속>은 예고편도 제작사 울타리를 벗어나 외주로 제작했다. 그 뒤부터 예고편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회사와 전문인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97년 홍보사 R&I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출발한 튜브픽처스 영상제작팀에 이어 모팩, 픽셀, 키메이커 등 예고편 전문 제작업체가 생겨났다. 여기에 프리랜서 감독, 광고를 겸업하면서 예고편을 만드는 회사까지 합쳐 현재 20곳 안팎의 업체가 예고편을 만들고 있다.
1분 안에 시선을 잡아라
예고편은 영화 개봉을 한달 앞두고 트는 본 예고편과, 개봉 서너달 전부터 내보내는 티저 예고편으로 나뉜다. 한국영화에서 본격적인 티저 예고편은 2000년작 <시월애>부터 만들기 시작해 2~3년 전부터는 제작이 대세가 됐다. 상영시간 2분 안팎의 본 예고편이 영화의 주요 장면과 스토리를 정보로 제공한다면, 1분 안팎의 티저 예고편의 목적은 호기심 유발이다. 튀는 아이디어는 그 핵심이다. 픽셀의 이규홍 감독은 “1분 안에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게 관건이며 이를 위해서는 로맨틱 코미디 예고편을 미스테리 식으로 구성하는 등 색다른 아이디어를 모두 끌어모은다”고 말했다.
코미디는 미스터리 구성
드라마는 게임처럼 뮤비처럼
만화에 등장하는 말풍선의 삽입, 깜찍한 그래픽 활용으로 2002년 튀는 예고편의 전기를 마련했던 <집으로…>, 영화는 다분히 정적인 드라마지만 예고편에는 발랄한 게임 형식을 도입했던 <질투는 나의 힘> 등은 영화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예고편으로 시선을 모았던 경우다. <집으로…> 예고편으로 그래픽 유행을 선도했던 이현식 감독은 “손자가 할머니를 설명할 때 ‘그녀’라는 말을 사용해 마치 로맨스처럼 흘러가다가 반전처럼 할머니의 실체를 보여주는 게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고 자평했다.
요즘 뜨는 예고편 유행, 연출제작 예고편
최근 티저 예고편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 장면을 별도로 연출해 찍어 만드는 연출 예고편이 인기를 끌고 있다. 세 젊은 주인공의 이미지를 극대화해 한편의 뮤직비디오처럼 만든 <늑대의 유혹>이나 세 남자가 한 여자를 코믹하게 훔쳐보는 〈S 다이어리〉가 모두 티저 예고편을 별도로 찍었다. 네 명의 남녀 주인공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으로 영화의 발랄함을 쉽게 전달한 <싱글즈>의 예고편의 연출 예고편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연출 예고편 제작에는 채은석, 용이 감독 등 CF 감독의 활약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교도소 복도로 끌려가는 여주인공과 철창 밖에서 애절하게 울부짖던 남자 주인공의 모습으로 관객을 압도한 <인디언 썸머>(채은석 감독)의 예고편 제작을 진행했던 싸이더스의 권정인 팀장은 개봉 뒤 관객들로부터 “예고편에 나온 장면을 보러 갔는데 왜 나오지 않느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연출 예고편이 보편화되지 않았을 당시 종종 받기도 했던 오해다.
최근엔 장면 별도연출 많아
전문제작사 20여곳 ‘시간전쟁’
한국형 예고편 만들기
티저 예고편과 달리 본 예고편은 영화가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감흥을 의도하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따라서 영화의 장면을 재편집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런데 영화 촬영이 끝나고 개봉하기까지의 기간이 6개월에서 1년에 이르는 미국 영화와 달리 한국 영화는 길어야 두세달이다. 그 안에 예고편 제작을 끝내야 하는데 영화의 가편집 테입을 받기까지의 시간을 빼면 작업기간이 길어야 한달 반이다.
예고편 제작비는 보통 편당 2000만~4000만원, CF 감독을 동원해 예고편을 위한 별도의 연출·촬영을 할 경우 8000만~1억원이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의 경우, 한국 영화 한편 제작비인 30억~40억원 가까이를 예고편 제작에 쏟는다. 또 한국 영화는 예고편 예산이 마케팅 비용에 포함되지만 할리우드는 제작비에 포함된다. 촉박한 시간, 제한된 예산 안에서 한국 영화 예고편은 화면과 사운드의 질보다 아이디어로 승부를 내는 경우가 많다. 여러가지 시도를 하면서 한국 영화 예고편은 한국 영화 못지 않게 빠르게 발전해가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녹음을 담당하는 나준택 기사는 “한국 영화 예고편을 본 외국인들은, 그 예고편을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놀란다”고 말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예고편 전문제작 모팩 한동성 실장
“이미지와 아이디어 싸움…
줄거리전달형 가장 까다롭죠”
예고편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회사 가운데, 제작 물량이 가장 많은 곳은 모팩이다. 1995년 컴퓨터그래픽 회사로 출발했다가 99년 <반칙왕>의 예고편을 만들면서 예고편 제작 전문 팀을 꾸려 컴퓨터그래픽과 함께 겸업하고 있다. 전체직원 20명에 예고편 전담 팀 5명이 한해에 제작하는 물량은 14~15편. <신라의 달밤> <황산벌>처럼 흥행에 성공한 상업영화에서부터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 등 작가주의 색채가 짙은 영화까지 다루는 영화의 폭이 넓다.
한동성(31) 편집실장은 홍대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모팩에 입사해 첫 작품으로 임종재 감독의 <스물넷>의 예고편을 만들었다. 그뒤 <피도 눈물도 없이> <와니와 준하> <광복절 특사> <질투는 나의 힘> <지구를 지켜라> <효자동 이발사> <바람난 가족> 등 많은 영화의 예고편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영국 팝그룹 블러의 노래 <송2>를 예고편 사상 처음으로 1천만원의 라이선스 비용을 주고 사와서 썼고, 예고편 자체도 비디오 테이프를 뒤에서 리와인드시키는 형식을 썼다. <신라의 달밤>은 컴퓨터 그래픽을 당시로선 ‘이래도 되나’ 하는 우려가 나올 만큼 많이 썼다. 석가탑이 빙글빙글 돌고, 글자가 툭툭 튀어나오고. 다행히 흥행이 잘 돼서 예고편 평가도 좋아졌고 투자·제작사로부터 보너스도 받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컷 수가 많지 않아 예고편을 만들기 쉽지 않았다. 한 실장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예고편을 만들면서 불경 낭송 같은 진중한 소리를 바탕에 깔았다. 화면에서 남녀가 벌이는 엉뚱한 행동들이 그 소리와 어우러지면서 묘한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키도록 의도한 것이다.
한 실장은 예고편의 유형을 세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이미지와 느낌으로 스토리를 전달하는 뮤직비디오 스타일로 주로 멜로영화에 많이 쓰이게 된다. 둘째는 아이디어 중심형으로 영화의 컨셉을 어떤 아이디어 속에 담아 전하는 것이다. <광복절 특사> 예고편은 주말의 명화 형식을 빌어와 차승원과 설경구가 빠삐용처럼 감옥에 갇히는 장면을 보여준다. 셋째는 스토리텔링형으로 할리우드 영화 예고편들이 많이 쓰는 방식이다. 영화 본편의 장면들을 편집해 예고편을 만드는 방식인데 실제로 이게 제일 힘들다.”
남이 만든 예고편 가운데 그는 한국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외국 영화 <스파이더 맨>을 베스트로 꼽았다. “<태극기…>는 사운드 작업이 충실하고 음악도 별도로 만들었으며 내용도 잘 전하고 있다. <스파이더 맨>은 스토리텔링 위주로 어떤 얘기인지, 이번엔 어떤 악당이 나오는지까지 전달하고 나서는 바로 성악 코러스를 깔면서 화려한 액션을 연이어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의 스케일을 과시하면서 그 정점에 타이틀을 내건다. 스토리텔링형 예고편의 전범인 것같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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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둘러싼 수수께끼
예고편은 사운드(음악과 음향)가 특히 중요하다. 90분이 넘는 영화를 1~2분 안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일은 청각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쉽지가 않다. 많은 예고편 제작자들은 좋은 예고편의 조건으로 사운드를 두세 손가락 안에 꼽는다.
자기 영화를 관객에게 좀더 세게 광고하고 싶어하는 영화 제작자들은 당연히 예고편의 사운드가 크고 자극적이길 원한다. 그러나 소리의 크기가 일정량을 넘어서면 관객들이 괴로워한다. 이런 폐해를 줄이기 위해 미국처럼 한국도 예고편에 사운드를 입히는 업체들이 모여 자율적으로 음량의 상한 규제선을 정했다. 영화진흥위원회 녹음실, 라이브톤, 블루캡, 웨비브랩 등 20개 업체가 지난 2003년말 모여 정한 이 상한선(LEQ값)은 85spl(사운드 프레셔 레벨)이다. 이 상한선은 영화 본편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듣기 힘들 만큼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영화라면 관객이 들지 않을 테니까 제작자들이 알아서 조절하게 되기 때문이다.
빵빵한 사운드 매력, 마구 키워도 될까 한국영화 예고편 내레이션 드문 까닭은?
사운드와 관련해 생기는 한국 영화 예고편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음악 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경에 까는 방식의 예고편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영화 예고편 제작비의 규모 안에서 공포, 액션, 공상과학 등의 장르 영화의 질감을 전하는 효과음을 별도로 만들어낼 사운드 디자인 비용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본 영화에 쓰이는 효과음을 예고편에 따서 쓰려고 해도, 본 영화의 사운드 믹싱이 이뤄지기 전에 예고편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의치가 않다. 그러다보니 분위기에 맞는 음악 한 곡을 선곡해 죽 흐르게 하는 방식이 잦아지고 있다.
내레이션을 쓰지 않는 것도 한국 영화 예고편의 한 특징이다. 몇몇 코미디 영화의 예고편을 빼고는 한국 영화 예고편에서 대사와 별도로 성우가 내레이션을 하는 걸 보기 힘들다. 미국 영화 예고편에서의 내레이션은 익숙한데, 한국어로 하는 내레이션이 어색하다고 여기는 충무로의 풍토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할리우드 영화의 예고편 하면 바로 떠올리는 돈 라폰테인 같은 성우가 한국에는 없다. 영화의 제목을 낮은 저음으로 무게 잡아 한번 읽어주고, ‘커밍 순’ ‘디스 섬머’ 같은 말을 들려주는 돈 라폰테인을 흉내낸 한국 영화 예고편이 있기는 있었다. <낭만자객> 예고편의 끝부분에는 영어식 억양이 섞인 ‘낭만자객’이라는 네 글자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이 내레이션은, 텔레비전 광고에서 영어로 된 제품명이나 회사 상호를 한번씩 읽어주는 일을 도맡아 하는 미국인 스톤버가 맡았다. 오래전부터 한국에 살면서 의 디제이를 했던 그는 한국 영화 예고편의 해외 버전에서 제목을 읽는 내레이션을 몇차례 맡기도 했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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