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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의 표지, 노출 장면이 많아 19세 미만 구독 불가 판정을 받았다. 현재 28권까지 발간. ⓒ 학산문화사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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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항로>는 나관중의 엄격한 중화주의 가치관에 대한 반역에 중점을 둔다. 동탁은 악인은 악인이되, 그 엄청난 악의 카리스마로 인해 보통 사람이라면 복종조차도 쉽지 않은 위력의 인간으로 그리고 있으며, 여포는 만화 속에서 조조의 말대로 '천하에 대한 선악은 없이 오직 용의 숨결만으로 세상과 싸워나가는 군신(軍神)'으로 그려진다. 나관중의 중화주의 가치관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우리로서는 비열함과 간악함의 색채를 지운 동탁과 여포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환호를 보낼 수밖에 없다. 역사가의 필치에 따라 인물이 왜곡되고 가려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의 변신은 동탁과 여포만이 겪는 일은 아니다. 비록 과장된 감은 없잖아 있지만, 조조는 그 풍부한 재능이 확실하게 살아나 선악은 물론이고, 일체의 가치관과 사상으로부터 초탈한 '앞서나간 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 단적인 증거가 조조를 환상적인 미남으로 그렸다는 점인데, 정사 <삼국지>에서조차도 조조의 외모를 보잘 것 없이 묘사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작가가 조조를 바라보는 관점이 드러나는 대목으로 볼 수 있다.<창천항로>의 조조는 만화 속에서 손책의 평으로도 드러나 있듯이 '백만 인간의 원한을 안주삼아 천하라는 술잔을 들이키는' 신의 대행자로 묘사된다. 지나치게 완벽한 인물인 탓에 다소간의 거부감은 느껴지지만, 개인적으로는 완벽한 재능으로 인해 조조가 대중들로부터 시달렸던 질투를 드러내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물론 가장 완벽한 파격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조조의 숙적인 유비와 제갈량을 들 수 있겠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엄숙한 모습은 어디에 버린 것인지 두 사람은 정상인과는 동떨어져 있다. 유비는 건달로 그려지며, 제갈량은 대단히 변태적인 인물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창천항로>는 유비와 제갈량을 그렇듯 파격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그들의 장점만큼은 <삼국지연의>보다 더 확실하게 살려놓는 영리함을 과시한다. 결국 어떤 인간에게든 그만의 확실한 재능은 있기 마련이며, 세상이 말하는 선과 악의 개념만으로 역사 속의 인물을 모두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그 외에도 작가는 많은 캐릭터들을 변신시킨다.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캐릭터는 관우, 장비, 조운 등의 유비의 가신들과 원술인데, 원술의 경우는 도대체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기에 <창천항로>에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로 비열한 악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창천항로>의 특색인 실감나는 캐릭터 묘사는 원소와 원술 종형제의 외모 변화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인간의 얼굴은 그가 걸어온 길을 드러내는 창문임을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주체 못할 정도로 쏟아지는 명언의 향연 밥을 입으로 옮겨 주는것은 손가락이다. 여인의 눈물을 닦아 줄수 있는 것도 손가락이고 귀중품을 손가락에 넣어 화려하게 장식할 수도 있다. 그 손가락, 그 손에 검을 쥐면...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프롤로그- 사직이란 땅의 신(神)인 사(社)와 오곡의 신(神)인 직(稷), 지상의 백성이 구하는 이 두 신을 받드는 곳이 바로 사직, 즉 국가인 것입니다. 천자는 사람의 형태를 한 하늘인 것입니다.
- 조조가 낙양에서 동탁의 잔당을 몰아낸 후 가진 천자와의 알현 중에- 조조의 길은!! 뭇 백성들에게 사랑받고자 함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동승이 주도한 조조 암살 미수 사건이 발각된 후 양위하려는 헌제에게 조조가- 첫째 사람을 다스리면서도 사람을 살피지 않는자. 둘째 난세와 싸우면서도 치세를 시작하려는자. 세째 하늘을 알면서도 천의를 거역하는걸 두려워 하지 않는자.
-진궁이 질문한 '군주의 세 가지 조건'에 대한 조조의 대답-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민초들의 눈높이에 맞춰 토속적으로 그리려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따금씩 엿보이는 캐릭터들의 과장된 행동과 대사 속에는 그 당시에 유행했던 창극과 민담의 흔적도 엿보인다. 대중들의 영향로부터 시작되어 고전의 대명사가 된 <삼국지연의>의 방향을 증명하는 것이다.하지만 <창천항로>는 <삼국지연의>의 토속적인 향을 지우며, 압도적인 무게감을 통해 또다른 <삼국지>를 창조하고 있다. 이야기의 전개는 <삼국지연의>보다는 <정사 삼국지>에 입각해 그리고 있으며, 작가의 풍부한 지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온갖 명언의 향연은 우리를 감탄시키기에 충분하다. 짧지만, 강렬한 대사들의 행진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때때로 그 무게가 너무나도 압도적인 나머지, 무게 자체가 과장으로 보여지는 때도 있지만, 무게감있는 사극을 좋아하는 우리의 취향을 돌아보면, 이 압도적인 무게는 큰 매력이 된다. 대부분의 <창천항로> 마니아들은 이 명언들로부터 비롯되는 힘과 무게에 매료된 이들이다. 이 짧은 글 한편을 통해 소개하기 벅찰 정도로 권마다 명언이 쏟아지고 있어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 될 듯하다. 발간이 드물게 이루어져 아쉬움이 느껴지는 <창천항로> 조조의 캐릭터를 보면, 영화 <패왕별희>의 장궈룽(장국영)을 보는듯한 경극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캐릭터나 주변 풍경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동양화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다분히 중국적이다. 그림을 맡은 만화 작가 킹콘타(왕흔태)가 대만계 작가라는 사실은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이야기는 제일교포 2세로 알려진 이학인이 맡았는데, 이학인이 도중에 지병으로 작고함에 따라, <창천항로>는 현재 그 발간이 대단히 드물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학인의 작고로 왕흔태가 이야기까지 맡음으로써, 발간이 드물어진 것 같다. <창천항로>를 꾸준히 본 독자는 어느 시점에서 이학인이 작고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특유의 폭발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주변을 바라보는 조조의 시선이 어느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다소 부드러워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킹콘타가 인간 조조의 일생을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그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다소 부드러워졌지만, 이따금씩 돌출되는 폭발적인 분위기와 함께 그 특유의 무게감은 여전하다. 현재 <창천항로>는 국내 번역본에서는 서량의 풍운아 마초의 대 조조 전쟁이 종료된 시점에서 발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일본판은 조조의 평생 가신 순욱의 사망과 함께 유비의 입촉 전쟁이 벌어지면서 마초, 황충, 위연이 유비의 새로운 가신으로 가담하는 이야기까지 진행됐다고 한다. 만화, 새로운 역사적 시선을 보급시키다 일본 만화의 두드러지는 점은 자국의 역사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베가본드>는 전설적인 검객이라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메이지유신을 기점으로 일어났던 유신지사와 신선조 간의 혈투는 일본의 역사 만화의 가장 흔한 주제가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 못지 않게 일본에서도 큰 사랑을 받는 <삼국지연의>도 킹콘타&이학인 콤비에 의해 새롭게 살아났다.만화는 대중이 가장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유난히 역사를 자주 소재로 삼는 일본 만화의 경향도 만화의 그런 장점을 확실하게 파악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여겨지는 역사를 통해 때로는 판타지를 그리고, 때로는 이렇듯 파격적인 시선을 담은 만화를 그림으로써, 대중이 한층 쉽게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터놓는 것이다.그런 면에서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음란물 논란'과 <남벌>을 통해 드러나는 이현세 만화 특유의 극우적인 경향은 차치하더라도 우리 역사의 감춰진 수수께끼인 고대사에 대한 도전을 만화를 통해 재조명했다는 사실 그 자체로 평가받을만 한 것이다. 결국 한국의 만화도 대중이 가장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을 확실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숙제를 남긴다.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이유로 일본 만화의 곁가지만을 차용해 '겉멋만 요란한 만화'만 만들어져서는 곤란하다. 일본 만화에 대한 진정한 극복은 어떤 소재를 이용하건간에 우리나라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맛을 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창천항로>와 <천국의 신화>는 한국 만화에 그런 숙제를 남긴 셈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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