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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싸움의 기술>의 포스터 ⓒ 코리아엔터테인먼트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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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오셨다. 매일같이 맞고 맞으며, 또 맞는 일상에 젖어있는 공고생 '병태(재희)'에게 '그분'은 구세주이다.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초탈'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분', 알고 봤더니 '싸움의 고수'였다. '병태'는 물론이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매일같이 뉴스를 장식하는 지독한 학원폭력 사태를 보면서 얼마나 구원을 기다려왔던가? 맞는 것이 두렵고 지겨워, 그저 단 하루라도 안맞는 것이 소원인 우리의 '병태'는 '그분'에게 매달리기 시작한다.
"싸움 좀 가르쳐 주세요오~"
백윤식, 신구의 이미지 '초탈'을 이어받다
'그분'은 중년배우 백윤식이 맡았다.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의 사기꾼 '백관장'을 맡아 열연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열었던 백윤식은 <지구를 지켜라>의 '강사장' 역으로 마니아들에게 어필하며, 스크린에서도 친숙한 배우가 됐다.
<지구를 지켜라>, <범죄의 재구성>, <그때 그 사람들> 등에 출연한 백윤식의 캐릭터를 돌아보면 모두가 하나같이 선이 굵고 강렬한 캐릭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의 변화와 함께 가정과 회사에서 일상에 찌들은 삶을 살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초라한 어깨를 쫙 펴준 캐릭터다. 백윤식은 이 선 굵은 캐릭터들을 통해 중년배우가 한물 갔다는 평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를 통해 스스로 입증했다.
혹시 또다른 중년배우 신구가 출연했던 햄버거 광고를 기억하고 있는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상황 설정 속에서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브라운관 밖의 시청자들을 향해 윽박지르는 모습은 젊은 세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광고를 계기로 신구는 제2의 전성기로 해도 좋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며, 모 디카 사이트의 합성사진 갤러리의 '필수요소'로 등극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 사이트의 생리를 아는 네티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곳에서 '필수요소'로 등극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10여년 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이순재)'가 한국과 중국 양쪽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이치와 똑같다. 그들은 시대의 빠른 흐름 속에서 소외받던 우리의 아버지들의 작아진 목소리를 그렇듯 당당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각박해진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그처럼 강한 인상과 더불어 정이 듬뿍 느껴지는 아버지를 원하고 있었다.
백윤식이 <싸움의 기술>에서 맡은 '오판수'도 그런 캐릭터들과 비슷하다. 독서실의 조그만 방에서 거주하는 그의 삶은 확실히 무언가 다른 냄새가 풍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만만히 봐서는 안된다. 그는 덩치가 커도 한참 큰 조직폭력배의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우드득' 소리와 함께 고치는 실력을 행사한다.
폭력이 난무하는 교실의 피해자인 '병태'는 '그분'의 확실한 싸움 실력을 보며, 한눈에 반해버린다. 귀찮아서 그런지 그렇게 떼어놓으려고 '그분'이 그렇게 노력을 해도 쉽지만은 않다. 당연하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열번 찍으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우리 속담이 '병태'의 마음을 증명한다.
폭력이 난무하는 붕괴된 교실에 대한 씁쓸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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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싸움 고수이신 '그분'은 초탈의 경지에 오르셨다. ⓒ 코리아엔터테인먼트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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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태'는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공고로 전학을 가게 됐다. 성적이 다소 뒤쳐지는 학생들이 많은 공고는 우리 사회의 성적지상주의로 인해 무관심과 무책임의 장이 된지 오래다. 교사는 학생이 피투성이가 돼 교실에 들어와도 눈길을 피하기에 바쁘다. 어른 못지 않은 폭력을 휘두르며, 안하무인에 가까운 행동을 일삼는 일부 학생들을 교사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사의 그런 무책임한 행동 앞에 일부 학생들의 폭력은 더욱 비열해지고, 더욱 잔인해진다.
영화 <싸움의 기술>은 일본 만화 <홀리데이>와 비슷한 설정으로 출발한다. 혹독한 구타에 시달리다 우연히 입수한 권투 교본을 통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폭력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홀리데이>의 '유우지'와 마찬가지로 <싸움의 기술>의 '병태'도 그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주먹을 불끈 쥐기 시작했다.
간절한 애원 끝에 '그분'으로부터 '싸움의 기술'을 전수받지만, 그 기술이 몸에 익기 위해서는 결국 가장 필요한 것은 '병태'의 노력이다.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병태'의 이야기는 적절한 유머와 혼합돼 관객들에게 우리 시대의 무너진 교실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그 적나라함도 보통 적나라한 것이 아니다. 등급 판정의 문제가 논란이 됐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싸움의 기술>은 우리 교실 속의 폭력과 욕설을 직접적으로 헤집는 당당함을 선보인다. 인문계 고교든, 실업계 고교든 욕설과 폭력은 남학생들의 생활의 일부가 된지 오래다.
사실 오래전부터 많은 영화들이 그들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다루었지만, <싸움의 기술>같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만큼 현실을 비추지는 못했다.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어쩌면 그만큼 현실적이기 때문에 지나쳐 보인 것은 아닐까? 이런 불편함은 외면할수록 문제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는 불편하더라도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며, 현실의 부조리를 고민하는 당당함이 필요하다.
전형적이기에 긴장과 감동을 주는 클라이맥스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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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지나친 무관심과 무책임 앞에 폭력은 매서워진다. ⓒ 코리아엔터테인먼트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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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형식의 영화라면 이야기 전개 방식은 영화를 미처 보지 못한 상태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세부적이지는 못하더라도 결말 역시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때때로 이런 전형성이 영화의 매력을 깎는 단점을 보이기는 하지만, 감독의 역량과 기술적인 편집에 따라 이 전형성은 오히려 눈부신 장점이 되는 순간도 많다.
영화 <싸움의 기술>은 확실히 전형적이다. <영웅본색> 류의 홍콩 영화를 연상시키는 클라이맥스 부분 역시 관객이 짐작하는대로 흘러간다. 하지만 재치와 무게가 동시에 느껴지는 편집과 더불어 자신을 억압하는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병태'의 처절한 주먹 앞에 이 전형성은 관객에게 밀도 있는 긴장감을 안겨주는 장점이 된다.
게다가 주먹이 오가는 직접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살면서 다양한 폭력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이 전형성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영리함도 선보인다. 폭력을 휘두르지만, 알고 보면 보통의 삶을 사는 우리보다 더욱 비열한 그들의 씁쓸한 단상은 우리에게 제법 용기를 주기도 한다. 스스로 '초탈'한 것처럼 거칠 것 없이 사는 것 같지만, 더 무서운 폭력 앞에는 납작 고개를 숙이는 그들의 비겁함은 결국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사람"임을 증명한다.
'병태'의 몸부림은 그렇기 때문에 더 처절하며,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물론 이 처절함에는 벌써부터 다양한 연기를 몸에 익히고 있는 재희의 잠재력 역시 만만치 않은 역활을 하고 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재희의 눈빛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싸움의 기술>, 아버지와 아들의 정(情)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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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을 거듭하며, '병태'는 성장하는 자신을 느낀다. ⓒ 코리아엔터테인먼트 /필진네트워크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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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인문계 고교에 다니던 '병태'는 아버지에 의해 미처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공고로 전학하게 된다. 형사인 아버지는 늘 바빠서 아들을 돌볼 여유가 없다. '병태'는 아버지의 본의아닌 무관심에 의해 그 많은 폭력 속에서도 속내를 털어놓을 안식처를 잃게 된다.
'그분'은 그래서 '병태'에게 더 큰 존재가 된다. 느낄 여유가 없었던 아버지의 묵묵한 정과 사랑을 '그분'을 통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질풍 노도의 시기'라는 청소년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지나치지 않은 관심과 사랑이다. '그분' 역시 '병태'를 아들로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영화 <싸움의 기술>은 적절하게 혼합된 오락의 요소와 함께 이렇듯 다양한 메세지가 섞여 보통 영화와는 다른 매력을 안긴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1970년대의 학생들의 현실을 이야기했다면, <싸움의 기술>은 우리 시대의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폭력과 욕설이 다소 지나친 면은 있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인 청소년들의 이야기이므로 청소년들이라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을 지켜보자면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지만, "맞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 돌아볼 계기를 만들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싸움의 기술>에 대해 가장 정확한 평을 내릴 수 있는 이들은 바로 청소년들이다.
단편 영화를 통해 많은 영화제에서 마니아들의 주목을 받은 신한솔 감독은 첫 장편 데뷔작인 <싸움의 기술>을 통해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을 과시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고발의 메세지와 오락적인 요소를 혼합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농밀한 노련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그에게 더 큰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 같다. 우리 사회는 결코 희망을 잃은 사회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서 고발과 각성을 요구한다. 그가 앞으로도 더욱 적나라한 이야기와 함께 유쾌한 유머를 통해 관객에게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해본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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