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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10 15:48 수정 : 2006.01.10 15:48

영화 <야수의 포스터> ⓒ 팝콘필름

세상이란 게 늘 그런거다. 뛰는 놈 위에는 늘 나는 놈이 있고, 힘센 자의 뒤에는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있다. 힘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 다소 남지만, 어쨌든 세상에는 힘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동물들이 산다는 저 밀림의 세계와는 달리 법이라는 고상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세상도 본질적으로는 약육강식이라는 큰 파도에 몸을 맡기며, 힘의 크기가 세상을 좌우하는 일이 많다. 남보다 큰 힘을 가진 자는 그 욕망의 크기도 힘의 크기와 비례한다.

그렇듯 큰 욕망은 때때로 '법'이라는 근본적인 체계나 상식과 부딪치는 법이 많은 법. 아니, 놀랍게도 욕망 그 자체가 법과 상충하는 경우도 많다. 세상에 늘 어지러운 이유는 힘을 가진 자들이 세상의 상식과는 어긋나는 욕망을 추구하며, 그 욕망의 추구에 있어서도 그릇된 방법을 동원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세상물정에 밝은 인간은 그런 힘 앞에 자신의 정당한 목소리를 내세우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어긋나는 일이지만, 인간은 상식보다는 당장의 목숨이 더 급한 어쩔 수 없는 동물이다.


'힘'이라는 야수 앞에는 결국 또다른 야수를 내세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영화 <야수>는 그 성향이 본질적으로 다른 야수들의 충돌을 다루고 있다. 거칠 것 없이 저돌적인 야수와 지능적이고 악랄한 야수의 대결은 영화 장르에서 자주 다룬 대결이지만, 그 대결의 현실성은 언제나 여전하기 때문에 그 흥미 역시 여전하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대로 투영된 영화, <야수>

안경이 잘 어울리는 유지태, 특유의 차가운 매력은 여전하다. ⓒ 팝콘필름

'유강진(손병호)', 그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조직폭력배다. 그는 겉으로 보면, 과거를 반성하며 자선 사업에 몰두하는 것으로 보인다. TV 뉴스에도 그를 그렇게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국회의원이 되려 한다.

폭력배 출신 국회의원은 전설적인 주먹이라는 김두한 이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폭력배 출신이라고 국회의원이 되지 말라는 법 역시 어디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며,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냐는 의지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에게 그런 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영화 <야수>는 그런 의지가 결여된 '유강진'이 더 큰 욕망을 위해 합법적인 권력을 탐하면서 시작된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판단력이 무척 좋은 폭력배다. 권력은 보장된 정통성에 따라 그 정당함이 입증된다.

하지만 선과 악은 늘 동시에 따라다닌다. 악이 질주하면, 선 역시 그에 뒤질 수는 없다.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강력반의 문제 형사 '장도영(권상우)'와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검사 '오진우(유지태)'는 악의 지나친 질주를 제어하기 위해 손을 잡는다. 선의 치밀한 반격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 <야수>는 전형성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들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만큼 열쇠를 쥐고 있는 것 역시 다름아닌 캐릭터다. <공공의 적>의 대성공 이후로 우리 사회의 정의를 대변하는 캐릭터가 된 '골통 경찰'과 그에 걸맞는 악랄한 악당, 그리고 그에게 전면전을 선포하는 머리좋은 검사 등의 이미지는 우리 사회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언제서부턴지 우리는 권력을 가진 이들을 지능적이고 악랄한 인간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에 걸맞는 라이벌의 위치는 '적당히'라는 기준은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는 '골통'들이 차지한다. 그들의 악랄함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상식을 뒤집는 골통 특유의 저돌적인 힘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인 듯하다.

캐릭터의 '힘'을 더욱 살리고 있는 배우들의 연기력

곱상한 얼굴에 걸맞게 한동안 곱상한 캐릭터를 주로 맡은 권상우는 영화 <야수>의 '장도영'을 계기로 본격적인 연기 변신을 시작한다. 연기 변신을 시작했다는 것은 배우로 거듭나려 한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최근 한국 영화의 긍정성은 많은 배우들이 여러 색깔의 캐릭터에 적응하며, 연기력을 성장시키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강인한 인상과 작지만 다부진 체구, 손병호의 '유강진'은 어딘가 실제인물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 팝콘필름

사공이 넘치는 배는 산으로 간다는 속담은 영화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속담이다. 물론 영화의 연출자가 배우의 역량을 얼마나 잘 살리느냐는 관건이 남아있지만, 영화계에서는 연기력 좋은 배우들이 늘어나고, 진지하게 연기에 임하는 배우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아니, 오히려 차고 넘쳐야 한다.

실제로 권상우는 영화 <야수>를 통해 연기자로 변신하고 있다. 극중 '장도영'의 직업이 형사인만큼 액션은 빠질 수가 없기 마련인데, 극중에서 이루어지는 '장도영'의 액션은 멋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묘미다. 맞아도, 맞아도 또 일어서서 덤비는 캐릭터 특유의 저돌적인 힘을 앞세우며, 권상우는 몸을 던지고 있다.

그동안 그에게 부정적으로 언급되던 발음 문제는 그 몸을 아끼지 않는 노력, 그리고 캐릭터가 가지는 현실성과 맞아떨어져 오히려 장점으로 거듭난다. 후천적인 노력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문제를 다소 좋지 않은 방법으로 지적하던 일부 관객들도 <야수>의 권상우에게는 그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나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선을 권상우에게만 집중시킬 수는 없다. 안경이 잘 어울리는 유지태는 검사라는 캐릭터를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신의 캐릭터로 소화시키고 있으며, 특유의 목소리도 빛나는 장점이 된다. <올드보이>의 '이우진'과 다소 비슷한 분위기의 캐릭터라는 점이 아쉽게 느껴지지만, '몸에 맞는 옷'을 한번 더 입었다는 이유로 비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그 옷만 고집해서는 곤란하지만 말이다.

<야수>를 보면, 김성수 감독이 배우의 장단점을 확실히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숨겨진 재능을 찾아내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직접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는 배우는 '유강진'을 맡은 손병호다.

연극배우 겸 연극연출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손병호는 선이 굵은 캐릭터를 통해 영화에도 자주 출연했지만, 대중적으로 크게 주목받은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다는 점이 유일한 아쉬움으로 남는 배우였다. 선과 악을 오가는 다양한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지만, 주인공과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악역을 맡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재미있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그가 맡은 캐릭터 '유강진'을 통해 실제로 한동안 '회개'의 선언과 함께 봉사활동에 집중하다가 다시 마약과 폭력 등의 범죄로 그 선언을 물거품으로 만든 특정인물을 연상시켰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손병호의 작은 체구와 다부진 인상이 그를 연상시키는 것 같은데, '유강진'이라는 캐릭터는 그런 이미지 연상을 통해 더욱 현실적인 힘을 가지는 것 같다. 게다가 깍듯한 예의 속에 숨겨진 거대한 욕망을 추구하는 캐릭터의 힘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손병호라는 배우의 개인적인 힘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홍콩 느와르의 단점까지 답습해 아쉬운 <야수>

골통 형사 '장도영' 역의 권상우, <야수>에서 그는 몸을 아까지 않는 연기력을 선보인다. ⓒ 팝콘필름

<야수>는 배우들의 열연과 특유의 갈색빛 화면, 홍콩 느와르를 연상시키는 설정과 장면이 확실하게 빛나는 영화다. 특유의 원색빛 화면과 처절함, 홍콩 느와르의 특징은 <달콤한 인생>과 <미스터 소크라테스>, 그리고 <야수>를 통해 확실하게 살아있다.

젊은 감독들이 새롭게 충무로에 진출하면서 그들의 성장기인 1980년대에 절정을 달리고 있던 홍콩 느와르의 색깔을 이렇듯 영화를 통해 자주 드러낸다는 점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사실이다. 우위썬(오우삼)의 헐리우드 진출 이후로 사향길에 접어든 홍콩 느와르의 원형이 한국 영화를 통해 부활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면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 <야수>는 그런 형식에 집중하느라 캐릭터들의 존재 근거를 자연스럽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장도영'이 끊임없이 외치는 '행복'과 '유강진'의 악랄함에 대해 영화는 더이상의 설명을 거부한다. 이런 단점 역시 거칠게 언급하자면 홍콩 느와르만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한국형 느와르의 안착을 위해서는 홍콩 느와르의 단점을 뛰어넘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이런 아쉬움은 한국 영화 사상 보기 드문 결말 부분을 통해 남김없이 씻을 듯하다. 그 시절, 홍콩 느와르에 열광했던 세대라면 충분히 감동에 젖을 수 있는 결말로도 볼 수 있다.

어쨌든 홍콩 느와르는 예상치 못했던 한국에서 부활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영화는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느와르가 많은 도전에 의해 곧 그 한계의 틀이 깨지고 있다는 점은 관객으로서는 새롭게 눈여겨볼만 하다. 앞으로도 한계를 깨는 패기의 힘이 한국영화를 풍부하게 살찌운다면 관객으로서는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을 것으로 본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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