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08 17:13
수정 : 2006.02.09 17:47
노승림의무대X파일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세상의 모든 클래식의 시선은 오스트리아, 그 가운데에서도 출생지인 잘츠부르크에 모이고 있다. 1920년 여름 처음 개최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이제 전세계 음악의 중심지로, 그 판도를 가늠하는 굴지의 공연예술제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출생지라는 근거를 제외하고는 음악적으로 크게 의미가 없는 곳이었다. 실제로 모차르트 생존 당시에는 변변한 오페라 극장 하나 없어 음악 활동 자체가 크게 위축되어 있었고, 이는 모차르트로 하여금 빈을 동경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잘츠부르크 돔 무직페라인 음악원이 설립된 것은 모차르트가 사망한 뒤 50년이 지난 이후의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처음 개최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또한 모차르트와 별로 연관성은 없었다. 1877년부터 1910년 사이 이곳에서 개최된 모차르트 음악제가 그 모태라고는 하지만 크게 개연성은 없어 보인다. 실제로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 그리고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 등 당대 젊은 예술가들이 오스트리아 황제의 재가를 받고 1920년 개최한 제1회 공연은 광장에서 후고 폰 호프만슈탈의 연극 <예더만>을 상연한 것이 전부였다. 음악은 물론 연극, 무용, 미술 등 예술을 전방위적으로 아우르는 것을 표방하던 이 페스티벌에서 음악, 그 중에서도 오페라가 부각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시작되고 나서도 한참동안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음악가들이 이 행사에 주목을 하게 된 계기는 정치성과 관련이 있다. 독일의 나치주의에 반대하는 음악가들이 하나 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모이기 시작하자 유럽은 이 조그만 도시에 음악이 아닌 정치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1936년 나치에 적극 반대하던 최고의 인기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이 예술제에 음악감독으로 참가하여 콘서트를 개최하면서, 마침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국제적인 축제로 도약했다. 토스카니니의 참여는 대단한 이슈로 부각되어, 이후 이 음악제의 참여를 기피하던 당대 대가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던 인물은 당시 토스카니니와 명성과 커리어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푸르트뱅글러였다. 잘츠부르크 측에서 아무리 초청을 하여도 무심한 거절로 일관하던 이 지휘자는 토스카니니의 소식을 듣고서는 갑자기 자발적으로 참여를 희망하고 나섰다. 푸르트뱅글러의 이러한 돌발적인 행동에 대한 분석은 그 의견이 분분하지만 토스카니니에 대한 과잉 경쟁심과 친 나치 예술가로 각인되지 않고 싶었던 정치적인 의도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토스카니니에 이어 브루노 발터를 예술감독으로 영입하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음악제로 그 명성을 굳건히 했다. 그러나 나치즘의 세력은 예술가들의 명성보다 더 크고 빠르게 성장하였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접수하면서, 나치즘에 반대하던 토스카니니는 음악제 참가를 거부했고, 브루노 발터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경쟁자가 사라진 페스티벌에 관심이 시들해진 푸르트뱅글러는 나치의 방해가 없었음에도 그 또한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노승림/공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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