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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15 17:08 수정 : 2006.02.16 16:56

노승림의무대X파일

오늘날 명곡이라 불리는 수많은 음악들이 작곡가의 생존 당시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슈만은 가장 불운한 경우에 속한다. 슈만의 음악세계는 본인에게는 유감스럽게도 1856년 작곡가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슈만이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1850년 지휘자로 있던 뒤셀도르프 오케스트라에서 무능하다고 비난받은 그는 매우 소심한 남자였다. 결국 그 상처를 못견디고 사표를 던지고 나와 은둔에 들어갔으며 유일한 제자이자 친구인 작곡가 브람스 이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이러한 고립은 우울증으로 번졌고, 몇차례의 신경발작을 거쳐 마침내 정신분열에 이르렀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내 클라라는 남편을 본 근교의 요양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슈만의 와병은 1854년 그가 뒤셀도르프에서 라인강에 투신하면서 결정적으로 세상에 널리 퍼졌다. 자살을 시도하였지만 미수에 그친 그는 심지어 거식증에까지 걸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글자 그대로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슈만의 분열은 그가 아직 멀쩡했을 때 벌써부터 기미가 엿보였다. 스승 비크를 감탄시킬 만큼 훌륭했던 피아노 실력은 그러나 1833년 아직 젊은 시절 손가락을 단련시키겠다는 이유로 약지를 다른 손가락에 묶어서 연습하다가 관절이 경직되면서 피아니스트의 길을 영원히 상실하며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여기에 이어진 형 율리우스와 형수의 죽음으로 재차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작곡만이 유일한 길이었던 그는, 그러나 동시에 음악가로서 문학이란 장르에 극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여러 필명을 가지고 왕성한 집필활동을 벌인 창조적인 문학가이자 비평가이기도 했다. 1833년 창간된 <음악신보>는 처음에는 슈만과 몇몇 친구들이 함께 만들었지만 이후에는 슈만 혼자서 여러 필명을 사용하며 편집을 꾸려나간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당대 음악계의 현학적인 속물들을 비판하고 공격했는데, 이를 위하여 <다비드동맹>이라는 가공의 결사단체를 만들었다.

여러 필명들이 거론되는 이 결사단체 안에서 슈만은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라는 두 가지 필명을 동시에 사용하며 자신의 분열된 인격을 드러내고 있다. 활달하고 저돌적인 성격의 ‘플로레스탄’과 그 반대로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오이제비우스’를 슈만은 아예 자신의 분신으로 삼고 오랫동안 이용하였으며 문학뿐 아니라 음악세계에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클라라 비크와의 결혼 전날 밤의 이야기를 담은 <다비드동맹춤곡집>은 슈만에게 분열 그자체야말로 훌륭한 창조의 원천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피아노 소품들이다.

슈만은 평생을 아내 클라라를 포함한 타인에 대한 질투와 콤플렉스로 보냈다. 그런 그의 죽음이 모차르트라는 눈부신 선배에게 가려 다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인 올해, 2006년은 슈만의 서거 150주년이기도 하다.

노승림/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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