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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15 17:33 수정 : 2006.02.15 17:33

‘신의 눈물’ 기다리는 인간의 축제

얀 파브르의 <눈물의 역사>(2월1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는 ‘늙은 유럽의 정신건강 차리기’다. 아비뇽 공연보다는 강도가 다소 약해진 느낌이 있지만, 여전히 현대의 경계를 이탈하려는 프로그램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그리고 현대가 서로 가로지르는 세계다. 거기서 현대 자본주의적 삶을 구원하는 중세적 비전이 대안으로 제시되는데, 그 터무니없는 진지함이 오히려 아방가르드의 기획으로 다가온다.

터무니없는 진지함은 다변의 언어로 출현하여 당혹스럽다. 절망의 기사는 우리가 ‘울고 있는 육체’를 잃어버렸다며, 그 회복을 주장한다. 그의 수사학은 잠언과 한탄이지만, 숭고의 감정은 자칫 조롱거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희화화할 처지임을 본인도 안다. 돈키호테 취급받을 줄 알면서도 ‘돈키호테-되기’를 감행한다. 요컨대, 기사는 이해받지 못하는 선지자이자 광인이다.

광대극에는 언어의 변증법이 있다. 기사가 인간의 구원을 말할 때, 개를 자처하는 자가 끼어든다. “나는 사람을 찾고 있소. 사람은 어디 있소?” 서구 휴머니즘의 치유는 르네상스를 낳은 중세의 가을밖에 없다는 주장에 대해 대체 휴머니즘이 어디 있느냐는 견유학파의 반문이다. 기묘하게도 터무니 없는 진지함이 위악스런 진지함과 엇갈리면서 차츰 간절해지지는 않는가.

이러한 다층성은 얀 파브르의 무대가 가진 게임의 규칙 같다. 첫 장면부터 신화와 역사의 결합이다. 하프 연주와 아기 울음소리가 15분간 대비되는 것은 아폴론에게 대항했던 니오베의 그리스 비극이다. 코스모스의 질서가 ‘울고 있는 육체’에 의해 요동칠 때, 참지 못하고 그 아기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기사는 말한다. “그들을 죽인 것은 야만인인가? 신인가?” 신화나 역사의 비극 모두 인간의 오만이 범인이다. 아기를 죽였기에 황무지가 마른 천둥과 번개를 거느린다. 처음에는 신의 징벌인 줄 알고, 팬티를 매단 백기를 흔들지만, 이내 비가 그립다.

여인 니오베이자 대비대자의 화신은 저기 꼭대기에서 인간의 운명을 굽어본다. 그녀의 눈물에는 염분이 없다. 농도가 없는 눈물에는 영혼도 없다는 어두운 성찰은 황무지 위에 유리 공예를 깔면서 비로소 이해된다. 빛을 머금은 공예는 ‘인공눈물’ 혹은 ‘성배’이며 동시에 진짜 비를 기리는 설치 미술로서 인상적이다. ‘벗은 몸’의 틈새에 눈물의 이미지를 끼우거나 그 위에 눕기도 하는데, 도발 속의 아름다움이 도드라져 의외였다. 중세풍의 해체된 신체에서 고전적 신체의 재현까지 시각 이미지는 다채롭게 번져갔다.

마침내 갈리아풍의 유쾌한 무용수와 함께 <사랑은 비를 타고>의 춤을 추는 유사 디오니소스 축제를 벌인다. 인간은 눈물, 땀, 침, 오줌, 정액을 들이밀지만, 하늘은 역시 어질지 않다. 기사의 설득은 막판에 와서야 사람들에게 먹힌 듯 합창된다. 그제야 어렵게 ‘아기-되기’의 실현! 퇴행이 아니라 잠재적 몸으로의 복귀. 죽임의 문화에서 삶으로. 이제 장광설은 비를 맞는 것인가.

하비 콕스의 말대로 제의와 환상을 결합해야 진짜 축제가 된다. 얀 파브르는 이것이 “우리들의 눈물의 역사”라고 한정한다. 보편을 가장하지 않으면서 몸의 각성을 제안하는 공연은 반시대적이라 더욱 더 와닿는다. 특히 하늘과 인간의 교감은 동양에서도 매우 익숙한 주제인데, 어떤 예술적 응답도 가능할 것 같다.

김남수/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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