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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01 22:49 수정 : 2006.03.01 22:49

노승림의무대X파일 - 발레리노 니진스키

모든 장르의 예술은 불세출의 천재를 탄생시켜 왔다. 이들 천재에게는 공통점이 몇 가지 존재한다. 요절, 불행한 삶, 사회 부적응, 그리고 시대의 전환기에 출현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남성 발레가 낳은 최고의 발레리노라 할 수 있는 니진스키에게도 똑같은 공식이 적용된다. 1890년 태어난 그는 발레리노로서 최고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스물 아홉 살의 나이에 정신분열증으로 은퇴했다. 춤꾼으로서 정식으로 활동한 시기는 8년 남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동안 그는 자신의 재능을 극한으로 발산하며 무대 안팎에서 무수한 업적과 일화를 남겼다.

남성 무용수를 여성 무용수들의 화려한 개인기를 위한 단순한 보조 무용수로밖에 인식하지 않았던 그 시절 니진스키는 여성들을 제치고 스스로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었다. 순수 백인이 아닌 헝가리계 마자르족 계열 출신이던 그는 작은 키에 굵은 다리, 그리고 누런 피부를 조상에게서 물려받았지만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니진스키의 출현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이 시점까지도 아무도 극복하지 못한 그의 높은 도약과 빼어난 테크닉, 그리고 예술성은 그러한 외관상의 약점을 보충해주고도 남았다.

유랑춤꾼이었던 부모의 피를 물려받은 그는 당연히 엄격한 형식에 집착했던 고전발레보다 새롭게 득세하고 있던 모던 발레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 그의 동성연인이자 유명한 모던발레 흥행사였던 디아길레프의 지원에 힘입어 그는 <목신의 오후> <봄의 제전> <페트루슈카> <장미의 정령> 등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난, 역동적이고 원시적 몸짓의 새로운 안무를 창조해냈다. 새 작품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는 와중에도 파리 부인들의 니진스키에 대한 애정은 일관성이 있었다. 그의 화려한 도약에 그녀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쓰러졌고, 그가 공연을 하는 곳이면 열차를 통째로 전세 내어 그를 졸졸 쫓아다녔다.

겉치레에 급급한 바람둥이들이 화려한 언변으로 파리의 뭇여성들을 유혹했던 것과 달리 불어를 할 줄 몰랐던 그는 오로지 재능 하나로 그들을 매료시켰다. 귀족들은 그를 사랑했지만 니진스키는 그러지 못했다. 한곳에 얽매이길 싫어하는 짚시 특유의 자유로운 정신은 20세기 초 마지막 잔치를 벌이고 있던 옛적 봉건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권위주의를 견디지 못했다. 여기에 그를 아끼다 못해 집착하는 수준에 이른 디아길레프의 과잉 애정이 더해지면서 결국 바이올린 현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천재 춤꾼의 신경줄은 이른 나이에 끊어져 버렸다.

8년간 무대 위의 시간을 뒤로 하고 1921년 은퇴한 니진스키는 무려 30년의 세월을 정신병동에서 지내다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연인의 정신병에 충격을 받은 디아길레프는 그보다 한 발 앞서 1929년 숨을 거두었다. 니진스키와 더불어 춤의 혁명을 시도했던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 사단은 니진스키의 은퇴와 더불어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해체되었다.

노승림/공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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