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3.06 09:31
수정 : 2006.03.0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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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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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베이스".
대학로에서 현재 공연되고 있는 배우 명계남의 야심작 모노드라마다. 영화배우나 탈렌트로 익숙해진 이미지 때문에 연극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생각을 망각하게 하는 그가,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원작 「콘트라베이스」의 이름을 그대로 따 온 이 작품을 통해 연기자로서의 원숙함과 연극인으로서의 저력을 동시에 뿜어내고 있다. 그가 대학로 연극 공간에 들어서며 10년만에 다시 선택한 이 연극이 얼마나 그에게 소중한지, 애정을 갖고 있는지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몰입의 열기를 느끼면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기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는 콘트라베이스 주자의 외침과 소프라노 '사라'에 대한 애정은 비록 세상을 향한 불만과 삼십육세 총각의 연정, 고단한 노동의 발자욱이 겹쳐 힘들어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소시민이 가진 열정과 애정을 듬뿍 쏟아낸다. 그래서 이 1인극은 1인이 하는 연극이 아니라 실상 이미 관객들과 함께 하는 연극인 셈이다.
연극에 대해 문외한인 필자도 그의 연기에 빠져 마치 그가 진짜 콘트라베이스 주자인 것으로 착각하여 그의 고단함에 절로 큰 한숨을 내쉬는 몰입에 이른다. 그러나 그 참맛은 배우 명계남이 콘트라베이스 주자인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자신의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인간과 콘트라베이스의 교감과 합일치, 즉 콘트라베이스 자체가 극중 나인지 내가 콘트라베이스 주자인지 알 수 없을만큼 관객을 숨막히는 빠른 도취에 이르게 하는 배우 명계남의 기가 막힌 연기 그 자체이다.
사실 초반부에는 그의 연기가 왜저리 굼뜨고 지루해 보이는가하는 의문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문은 곧 그가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배우 명계남의 굳어진 이미지를 버리고 극중 화자로 다가가고 보이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연극을 앞두고 어디서 자다나온 사람같은 표정과 말투등은 이미 철저하게 계산되고 연습되어 배우 명계남이 아닌 완전히 다른 사람의 시각과 입장에서 보여지는, 연극배우로서의 프로패셔널한 연기의 진수이다. 그런데 왜? 왜 배우 명계남은 일반인에게 생소하고 그리 특별나지도 않는 콘트라베이스 주자를 주인공으로 선택하는 모험을 시도했을까? 무언가 이 연극에 담아내려 했던 배우 명계남의 던지려 하는 메세지의 방향은 무엇일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의 길을 가려 하는 겸손과 용기, 남을 사랑하기에 앞서 자신을 사랑하려 하는 콘트라베이스 주자의 모습은 흡사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내 주위의 사람들과 비슷하다. 일종의 동지적 애정을 느끼게 한다 할까. 이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구성 인자이면서도 개개인적으로는 나약하고 억압받는 한사람의 개인, 수많은 외로움에 지친 동시대의 수많은 청년들의 외침을 배우 명계남은 1인극이라는 툴안에서 교묘하게 말하고 있다.
고뇌하는 이 시대의 이름없는 사람들의 인간적 내음이 콘트라베이스의 낮은 선율을 타고 관객의 객석을 흐르며 심금의 울림을 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배우 명계남의 “콘트라베이스”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에 대해 고민하거나 또는 인생의 목적에 대해 고뇌하는 청춘들이라면 배우 명계남이 들려주는 콘트라베이스의 선율에 한번쯤 자신의 몸을 태워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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