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3.15 18:21
수정 : 2006.03.15 18:21
노승림의무대X파일 - 쇼스타코비치
2006년을 맞이해 국내 오케스트라들이 특별히 주목하는 작곡가가 있다면 그것은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쇼스타코비치일 것이다. 그가 남긴 무려 열다섯 곡이나 되는 교향곡 가운데에는 아직 국내 초연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작품이 허다하다. 실제로 한국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이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는 연주의 난이도라든가 오케스트라의 수준 여부와는 또 다른 문제인데, 공산주의 작곡가라는 이유로 그의 모든 작품은 냉전시절 금지곡의 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은 물론 해외에서는 보편적으로 유통 되는 음반까지도 국내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니, 카라얀이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마저도 검열의 대상으로 삼았던 냉전 시대의 웃지 못할 ‘추억’이다.
흥미롭게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옛 소련 연방 본토에서도 금지곡 처분을 받은 이채로운 기록이 있다. 스탈린이 가장 애호하는 음악가이자 뼛속까지 ‘징한’ 사회주의자였던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작품은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이라는 오페라였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동명소설을 소재로 한 이 오페라는 셰익스피어 원작과는 전혀 상관 없이, 고용인과의 불륜 때문에 남편을 살해하고 유형지에서 연적의 여자 죄수를 데리고 자살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사회 비판을 담고 있다.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천재 작곡가로 추앙받고 의기양양해 하던 쇼스타코비치는 1926년 야심차게 작곡을 시작해 무려 6년에 걸친 공을 들여 이를 완성했다.
1934년 1월22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말리 극장에서 초연된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은 작곡가의 노력만큼이나 당시 관객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유일하게 박수를 치지 않고 표정이 굳어 나간 관객이 한 명 있었으니 다름 아닌 스탈린이었다. 다음날 옛 소련의 기관지 <프라우다>는 스탈린의 지령으로 이 작품에 대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어긋나며 지극히 부르주아적이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는 혹평을 실었다. 작품은 이미 서구에까지 알려져 뉴욕, 클리블랜드, 런던, 프라하, 취리히 등에서 초연을 거듭하며 잇단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쇼스타코비치의 ‘맥베스’는 본토에서 상연 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작곡가 당사자는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수모를 당했다. 소심한 음악가였던 쇼스타코비치는 이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이듬해 교향곡 4번을 초연하려고 리허설을 하다가 스스로 작품을 철회할 만큼 심약해져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소련 당국의 예술에 대한 간섭이 극성스러워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그는 4번을 건너뛴 후 교향곡 5번으로 다시금 당국에 의해 국가적 영웅으로 복권되었다.
그로부터 30년 뒤, 모스크바에서는 쇼스타코비치에게 그때까지도 금지되어 있던 ‘멕베스’의 개정을 의뢰했고 이에 작곡가는 스탈린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두 군데를 수정하여 1956년 개정판을 내놓았다. <카체리나 이즈마일로바>라는 제목의 이 개정판은 1965년 스타니슬라프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어 다시 한 번 화제를 낳았다.
노승림/공연 칼럼니스트
alephia@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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