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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15 18:35 수정 : 2006.03.15 18:35

엘튼 존 이래 8년여만에 영국 뮤지션 미국 석권


11일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곡은 제임스 블런트의 ‘유 아 뷰티풀(You’re beautiful)’이었다. 영국 뮤지션의 곡으로는 엘튼 존의 ‘캔들 인 더 윈드’(1997) 이후 무려 8년 2개월 만에 처음으로 미국 싱글 차트를 정복한 빛나는 이정표였다. 비록 일주일만에 또 하나의 힙합 곡에 그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십 년 이상 차트를 독식해오고 있는 흑인음악 대세의 미국 시장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신인 싱어-송라이터의 데뷔곡이 이뤄낸 현재의 성공은 분명 괄목할 만한 것이다. 실제로 엘튼 존의 97년 히트곡 이후 제임스 블런트의 등장 이전까지 아르앤비·힙합 성향이 아닌 곡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한 남성 뮤지션은 겨우 세 명에 불과하다.

지난달 벌어진 영국의 그래미 ‘브릿 어워드’에서 최우수 남성 가수와 팝 부문을 수상하며 음악적 능력을 검증받은 제임스 블런트는 이제 성공의 궁극적 척도인 미국 시장마저 접수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최근에는 한 자동차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국내에서도 그 인기가 날로 상승하고 있다.

전장에서 돌아온 소년 같은 목소리

1974년생인 제임스 블런트는 우리 나이로 서른 한 살에 데뷔 앨범 <백 투 베들램>을 발표하였다. 저연령화 추세의 대중음악 시장에서는 이례적이랄 정도로 늦은 데뷔다. 실제 나이는 그보다 네 살쯤 더 된다는 소문도 있다. 변성기를 겪고 있는 소년 같은 목소리와 서정적 감수성이 두드러진 그 음악적 표면과는 현격한 괴리감이다. 군인으로 복무했던 그의 이력은 더욱 특이하다. 예술가와 군인은 직업분류표의 양쪽 끝에 자리할 만큼 상호 대척적이기 때문이다.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하고 ‘뷰티풀’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는 남자에게서 살벌한 전장의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를 맡는다는 건 짐작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31살 늦깎이 데뷔
첫 앨범 빅 히트
학살장 코소보서
좌절한 그래서 진정 부드러워진

그런 제임스 블런트의 경력에서 극적인 분수령이 된 것은, 짐작건대, (며칠 전 감옥에서 의문사한) ‘발칸의 도살자’ 밀로셰비치가 자행한 인종청소 현장 코소보에서의 경험인 듯 보인다.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왕실근위대 장교로 폼나게 복무하던 그가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차출된 결과 목격한 광경은 군인의 길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참상이었기 때문이다. 데뷔앨범 수록곡 가운데 하나인 ‘노 브레이버리’가 당시에 만들어진 곡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언한다. 나머지 수록곡들과는 완전히 다른 어조로 노래하는 이 곡에서 블런트는 “부녀자들은 난자당하고 강간당했다. 한 세대가 증오로 물들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결국 그의 늦깎이 데뷔는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서 겪은 끔찍한 시행착오와 그로부터 자신의 재능을 깨닫게 되는 의식의 유턴 과정으로 설명되는 셈이다.

먼 길을 돌아 오긴 했지만 일단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은 이후에는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홧스 업’이라는 곡으로 90년대 중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그룹 포넌블론즈의 그 (커다란 입을 가진 여자) 린다 페리가 그를 발견하고 계약을 맺은 뒤 일년이 채 가기 전인 2004년 10월에 데뷔 앨범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나지 않아 제임스 블런트는 <백 투 베들램>과 그 수록곡 ‘유 아 뷰티풀’로 영국의 앨범과 싱글 차트를 동시 석권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오아시스와 콜드플레이 등 최고 인기 밴드들의 신작을 젖히고 얻은 성과이기에 더욱 빛이 났다. 올 1월, 뒤늦게 앨범이 공개된 미국에서의 성공은 그 화룡점정이다. 영국 최고의 인기 스타인 로비 윌리엄스조차도 넘지 못한 미국 시장의 벽이 그의 감미로운 발라드 앞에서 녹아내린 것이다.


제임스 블런트의 음악은 무엇보다 그 서정적이고 명료한 멜로디로 청자를 사로잡는다. 포크의 담백한 어쿠스틱 사운드와 백인 솔의 풍부한 감성이, 히스테리컬하면서도 편안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그 목소리의 섬세하고도 독특한 떨림으로 직조되어 정중동의 파문을 그린다. 지난 몇 년간 영역을 확장해온 포크 성향 신진 뮤지션들의 조용한 약진에 힘입은 타이밍도 좋았다. 배설에 가까운 단어의 홍수, 비속어와 욕설의 난무로 점철된 랩 음악에 식상함을 느끼기 시작한 대중들에게 그의 음악은 편안한 감성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

어떤 평자들은 시대성의 부재와 치열함의 결여를 근거로 블런트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소녀적 취향과 미성년자 같은 목소리를 웃음거리 삼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제임스 블런트가 직업 군인이었음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전쟁이 소년을 남자로 만드는 것처럼, 야만적 살육의 현장을 종군했던 ‘제임스 블런트 중위’에게 그런 평가는 안락함에 겨운 샌님들이 이종격투기에 열광하는 것과 같은 모순적 위선으로 비칠 테니까 말이다. “죽은 사자의 몸뚱이 위에서는 토끼도 도박을 할 수 있다”는 고대 로마 극작가의 냉소를 떠올릴 일이다.

‘유 아 뷰티풀’, ‘굿바이 마이 러버’, ‘티어스 앤 레인’, ‘크라이’ 등 수록곡의 제목에서 엿보이는 사랑과 이별의 낭만적 감상에 대한 제임스 블런트의 천착은 혹독한 겨울을 지내고 봄의 따뜻함을 감사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화이트 데이’의 요란한 장삿속을 지나치며, 저 뻔한 초콜릿이나 사탕 대신, 이런 앨범을 선물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그 때문이다. 노래 제목까지 나서서 도와주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아름답습니다”라고.

글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사진 워너뮤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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