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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22 23:33 수정 : 2006.03.22 23:33

익살맞은 ‘몸짓’ 으로 보는 클래식


서구 클래식 음악은 옛 거장들의 영혼이 공감을 통해 겨우 존재하는 세계이다. 영혼이란 뉘앙스가 가진 공허와 추상을 감수하면서도 자기만족적인 내면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역동하려 애쓴다. 클래식 음악을 춤춘다는 것은 자칫 형식으로 떨어질 위태로운 내면, 순수한 음의 울림을 다시 인간의 몫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열리고 닫히는 몸, 리듬을 먹고 새로운 리듬을 누에처럼 내놓는 몸이 되는 것이다. 음악을 음미하면서 춤추는 몸은 음악이 만들어지는 순간의 미학을 존중하면서 신체의 체험으로 음악을 확장시킨다.

세계정상급 현대안무가 3인
베토벤·슈베르트 개성적 해석

프랑스 리옹 국립 오페라발레단의 공연(3월15~16일 고양어울림극장)은 분별없는 도취의 음악이 아니라 춤추는 몸 위에 ‘오바로크’되는 음악, 몸의 현상이 되는 음악으로 클래식의 생명력을 새롭게 환기시켰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세계 정상급 현대안무가 3인이 각자의 개성과 해석을 가진 안무로 발레와 클래식을 함께 버무려 요리했기 때문이다.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는 재즈의 즉흥연주가 남기는 한 오리의 선율조차 미세지각하는 춤으로 돌려놓는 솜씨로 정평이 나 있다. 물 한방울 새지 않는 그녀의 안무는 베토벤의 음악을 <대푸가>라는 시각적 공간적 편곡에서는 의외로 대범했다. 선율의 계기들에 순응하면서도 약간의 인간적 계기들로 물결치게 하는 솜씨는 여전했지만, 무용수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거시적인 리듬 체계에 더 집중했다. 음악의 순수령에 따르면서도 무대의 시공간을 폭넓게 활용하는 면이 짙었다. 다만 영화음악처럼 영상 이미지에 종속되고 결정화되는 흐름이 아니라 움직임 이미지로 인해 더욱 역동하고 비결정화되는 흐름이 안느의 전략이었다.

사샤 발츠의 <환상>은 슈베르트의 음악에 오마주를 바치는데, 확실히 탄츠테아터(춤연극)의 문법에 익숙한 그녀에게는 다소 힘에 부친 느낌이었다. 선율적인 악센트의 초반부를 반복하는 론도 형식과는 무관하게 폭력의 교환, 몸을 이용한 조형술, 날고있는 새의 단순한 흉내 등등이 펼쳐졌다. 하지만 차이와 반복의 리듬에 속하지 않은 채, 부유하며 미끄러지는 인상을 낳았다. 필름느와르풍의 조명은 확실히 독일표현주의의 암시지만, 음악적 권능에 대해 망설이는 태도를 취한 안무는 일관성이 깨어졌다.

이날 공연의 백미는 단연 마기 마랭의 <비대한 세상>. 그녀는 <박수만으론 살 수 없어>에서 불행한 역사가 지나가도 파시즘의 흔적은 몸에 오래 지속된다는 날카로운 통찰을 선보인 바 있다. 좌파인 동시에 뉴 웨이브의 거장인데, 이번에는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낙천적이고 해학적인 마을 축제의 정경으로 바꿔 놓았다. 날렵한 발레무용수들에게 살진 신체의 옷을 입혀 ‘곰둥이’의 몸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순진한 열정과 내숭 그리고 사랑의 본능을 연기하게 한다. 풍만한 몸을 벗겨놓자 옷가지를 챙겨서 도망치는 장면이라든가 숫제 벗은 몸으로 춤추는 장면은 핏기잃은 현대의 몸에 대한 도발이자 각성이다. 몸 위에 입혀진 몸은 현대미술의 개념이면서 루벤스에서 보테로까지의 그림을 생각나게 한다. 부대한 사람들의 즐거운 인생, 몸의 긍정이 익살맞게 암시되는 것이다. 언제 들어도 쾌적하고 참신한 바흐의 음악을 능청맞은 발레로 표현하는 대목들은 보는 이들을 행복하게 한다.

김남수/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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