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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05 21:56 수정 : 2006.04.05 22:00

20세기초 스위스 천재화가 파울 클레 국내 첫선


“미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스위스의 천재 화가 파울 클레(1879~1940)가 남긴 이 명언은 전쟁과 공황, 학살 등으로 얼룩졌던 20세기 초를 살았던 미술가들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화두였다. 서구 사회가 숭배해온 이성이 광기를 부려 낳은 비참한 시대상을 예술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시인이었던 클레는 스폰지 같은 감수성으로 불온한 동시대의 징후들을 죄다 빨아들이면서 일종의 서양풍 문인화를 그렸다. 평생 독서와 동화적 상상력에 심취했던 그의 손끝에서 아이 그림 같은 천진난만한 형상과 리듬감 넘치는 선, 신비스런 색덩어리들이 끝없이 튀어나왔다. 1930년대 나치정권으로부터 ‘정신병자’로 낙인찍혀 작품들을 몰수당하고, 교수직에서 쫓겨나는가 하면, 말년 근육경색증이라는 희귀병에 시달리는 등 지지리 복 없는 삶을 살았던 생애에 비춰본다면 이들 그림은 그의 삶을 기묘하게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초기 흐느적 깔깔한 선묘 ‘섬뜩한 드로잉’
중년 표현주의 담은 ‘강렬한 수채화’
말년 나치 박해·지병 이긴 ‘비장한 유화’

서울 올림픽공원에 자리잡은 소마미술관(옛 올림픽미술관)의 개관 전시인 파울 클레 전 ‘눈으로 마음으로’(7~7월2일·02-410-1066)는 환상적인 상징적 그림과 예리한 드로잉으로 우울한 시대와 인간의 내면 사이를 자유롭게 섭렵했던 한 지식인 화가의 그림 여정을 살펴보는 자리다. 클레의 첫 국내전인 이번 전시에서는 스위스 베른의 클레 미술관이 소장한 초창기~말년기 드로잉, 판화, 회화 60여점이 나왔다. 흔히 알려진 대표작들은 드물다. 하지만 크게 세 시기로 나눠 작가의식의 특징을 도드라지게 집약한 작품들이 컬렉션되어 클레의 화풍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1전시실에 있는 초창기 세련된 선묘 드로잉들이다. 일찍부터 잡지 일러스트나 풍자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가늘고 흐물흐물한 선으로 인물과 풍경에서 느낀 주관적 감흥을 신경질적인 선으로 단번에 뽑아내고 있다. 머리를 손으로 받친 채 형형한 눈을 위로 치뜬 청년의 드로잉과 날카로운 눈빛이 빛나는 작가의 자화상, 볼테르 소설 <캉디드>에서 모티브를 따온 인물 군상들, 베른의 부유하는 풍경 등은 모두 섬뜩한 충격을 주는 작품들이다. 유령처럼 흐늘거리다가도 깔깔한 선묘로 돌변하는 다기한 선의 느낌들이 시대의 불안과 좌절, 고독감 따위를 전해준다. 2전시실의 ‘선에서 색채로’는 그가 칸딘스키, 마르크 등과 표현주의 그룹 청기사파를 결성한 즈음부터 20년대까지 색채화를 보여준다. 1914년 튀니지 여행 이후 색채에 눈뜬 그는 음악적 운율과 리듬감에 바탕한 아름답고 강렬한 색채 덩어리들을 수채화로 그린다. <여러층의 작은 구조들> <피라미드> 같은 작품들은 기하학적인 원과 네모의 윤곽과 색면들이 연주하듯 발랄하게 겹치기도 하고, <오르페우스를 위한 동산>처럼 편집증적인 선으로 중첩되어 마치 광시곡을 듣는 듯한 느낌을 안겨준다.


3전시장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33년 베른으로 피신한 뒤 생을 마치기까지 정열적으로 작업했던 유화 중심의 작품들 모음이다. 가는 선 대신 검고 굵은 선으로 화면 위에 동물상이나 인간들, 혹은 죽음을 상징하는 천사들의 반추상적이미지를 담은 작품들이다. 삼베 위에 파스텔로 눈과 검은 선으로 입과 얼굴 윤곽을 그린 <눈>, 현실과 이상 사이를 부유하는 작가적 실존을 상징한 듯한 대표작 <줄타기 곡예사>,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듯한 <죽음의 천사> 등에서 파시즘과 전쟁이 대두하던 당대의 불안감과 나약한 인간에 대한 풍자적 정신이 읽힌다. 연필 드로잉 <합창단의 여성가수> <공을 타고 노는 아이> 등은 인물들의 독특한 동작을 간단한 선묘로 포착한 것인데, 근육경색증으로 굳은 손을 간신히 놀려 작업한 대가의 비장한 정열이 감동을 안겨준다.

전시는 클레가 자신에게 닥친 동시대의 변화상을 자기 내면 속에 정직하게 수용하면서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새 전형들을 계속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귀없이 네모진 얼굴에 눈을 감고 명상하는 작가의 석판화 자화상은 이런 미덕을 함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환기나 장욱진 같은 국내 대가들이 클레의 색면구성이나 유아적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아 전혀 다른 동양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감상의 재미는 배가된다. 한편 미술관은 4월8, 22일 클레의 손자인 알렉산더 클레 등을 초청해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강연회를 마련하며 어린이를 위한 수채화 교실도 연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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