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10.08 22:14 수정 : 2006.10.08 22:19

‘몸의 반복’이 지핀 리듬의 들불

걸어가고 서고 팔을 뻗는다. 6명의 무용수가 무리지어 한 방향으로 가는데, 한 사람이 낙오되어 모두의 눈총을 받는다. 그 낙오자가 기어이 버텨내자, 따르는 무리가 생긴다. 사람의 물결은 이렇게 다시 흘러간다. 구슬게임을 하듯 쌓고 부수는 놀이가 된다. 무심한 걸음, 가다 서는 지점에서 불쑥 솟아나는 리듬의 변이가 재미있다. 또 이런 장면. 여자들이 남자의 대머리를 자꾸 만지거나 엉덩이를 끊임없이 쓰다듬는다. 웃음의 진폭을 높여가는 삶의 음화는 뒤집어져 있다. 끊임없이 중심과 탈중심을 오가고, 유희를 삽입하면서 차이 있는 반복의 리듬(리토르넬로)은 풍성한 직물이 되어 있다.

<걷다 서다 팔을 뻗다>(9월28∼30일· LIG소극장)는 성기게 시작한다. 세 가지 동작이 상황과 관계를 만나면서 점점 축적되는 코드의 세계로 펼쳐진다. 정영두는 이 상승과 확장의 리듬 체계에 특장이 있는 안무가다. 그는 반문한다. 현실은 복잡하지만, 미디어나 하이테크가 무대의 주인공일 수 있을까. 현실을 담아낸다고들 하지만, 그 현실이란 무엇일까. 미디어화한 감각의 질에 현혹되기보다 몸과 몸이, 몸과 세계가 만나는 질이 좀더 본원적인 것이 아닐까. 이미지의 혼돈이라는 혐의가 짙어지는 현실을 향해 정영두는 한 올의 소박한 리듬을 들어보인다.

한동안 그가 역주행했다고 하면 지나칠까.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춤은 애써 본질을 찾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헤진 관념과도 잠시 스쳤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번 무대에 오른 여러 작품은 차이 있는 반복이 어떻게 바닥에 낮게 깔리는 들불의 리듬으로 번져가는지 다채롭게 음미하기에 좋았다. 그런데 음악은 없다. 외부에서 주어진 박자는 들불을 인위적으로 조정하지만, 내부에서 생성되는 리듬은 자유롭게 지피고 변주하기 때문이다. 무언의 리듬을 통해 비로소 몸은 리듬적 몸이 되고, 무대는 선율적 풍경이 된다.

<텅 빈 흰 몸>은 몸의 윤곽선을 타고 나아가는 손길이나 구부러지는 몸의 결을 반복하면서 리듬의 진원지를 좀더 간명하게 탐문한다. <긴 침묵> 역시 비슷한 계열로서 목에 동그란 선을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으며 바닥에 구르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담담하게 받아들인 극한 상황을 암시한다. 그런가 하면, <더 사이드 오브 블루>는 색다르다. 무용수가 헤드셋을 끼고 흥얼거리는 노래가 CDP의 음악으로, 다시 보이스오버의 음악으로 확장된다. 음악을 배제하던 정영두는 여기서 공기를 흔드는 소리가 무대 공간을 어떻게 먼지투성이의 푸른 공간으로 여는지 실험하는 듯하다. 전체를 조감할 때, 빠름과 느림, 무거움과 가벼움, 웃음과 슬픔은 서로를 경원하지 않고, 정영두가 꿈꾸는 춤의 코드 체계 속에 포괄되는 느낌이다. 차이 있는 반복이 다성적인 정감을 가졌다.

정영두는 이미지의 엔지니어링에 쉽게 편승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고전 발레처럼 규정된 아름다움에 탐닉하지도 않았다. 그 옹골찬 추구가 이번 무대에서 폭과 깊이로 현상되었다. 물론 과정의 몫으로서 기존 작업을 연상시키는 면도 있지만, 정영두는 새로운 표현하기의 영토를 찾고 있었다. 삶의 위태로운 위상을 의식하는 그가 현존과 리듬적 몸으로 이 혼돈을 치유할지 모르겠다.

김남수 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사진 LIG아트홀 제공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