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0.15 18:57
수정 : 2006.10.15 19:00
‘색색의 방’ 안에 갇힌 인생
영화 팬들에게 부산국제영화제가 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일러주는 가장 큰 행사라면 공연예술을 즐기는 이들에게 올해로 6회를 맞고 있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는 동시대 다양한 공연예술의 경향과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베세토 연극제, 시댄스 등과 시기적으로 겹치면서도 공연예술제에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데, 그것은 이 축제의 해외 연극이 상당수 동유럽 작품들이고 무용의 경우 벨기에나 프랑스의 실험적 작업들임에서 연유하는 듯하다.
개막 1주일, 지금까지 공연된 작품들은 과장 없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드러내는 소박한 중소규모의 작품들이 많았다. 그만큼 별다른 자극 없이도 시간을 지탱하는 능력을 관객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때마침 불어오는 스산한 가을바람의 우울을 동종요법의 방식으로 중화시켜주기도 하니 공연의 열기라는 것이 꼭 흥겨움과 동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개막작인 연극 〈정화된 자들〉(사진)은 아직까지 이름만이 떠돌던 영국 작가 세라 케인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희곡 다섯 개를 남기고 1999년, 28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세라 케인은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와 함께 유럽에서 극작가의 연극을 부활시킨 작가로 평가된다. 작년 공연예술제에서 공연된 박근형 연출의 〈서쪽 부두〉가 한국에서 콜테스 연극의 진정한 붐을 일으켰다면 올해 〈정화된 자들〉은 많은 관객에게 세라 케인의 무대와 첫 만남을 가능케 했다.(그의 유작 〈4.48. 싸이코시스〉는 젊은 여성 연출가 박정희 연출로 공연예술제 후반(10.21~23)에 공연될 예정이다.)
크시슈토프 바를리코프스키 연출로 폴란드 브로츠와프 현대극단이 공연한 〈정화된 자들〉은 세라 케인 희곡의 잔혹함과 충격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오히려 조용한 연극이 되었다. 대학의 밀폐된 ‘방’들을 색깔별로 변주하여 다양한 폭력과 애정 행위들을 펼쳐놓은 희곡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화려한 조명의 세계로 전화시킨 이 공연은 연극적이기보다는 시적이었다. 삼면을 반투명하거나 높은 흰 벽으로 둘러치고 안마대나 샌드백, 병원 침대와 샤워기들을 공존시킨 무대는 흡사 피나 바우슈 류의 탄츠테아터에서처럼 추상성이 극대화되어 ‘빠져나갈 수 없는 인생’의 은유적 공간이었다.
“만일 네 인생에서 한 가지를 바꿀 수 있다면 넌 뭘 바꿀 거야?”라는 질문에 “인생”이라고 짤막하게 대답하는 극중 그레이스의 말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를 슬퍼하는 작가의 단말마적인 외침으로 들린다. 깨끗하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에는 결격과 다르지 않다는 작가의 인식이 사춘기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순간순간 접하게 되는 슬픈 진실이다. 이에 맞서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연극은 모든 도덕적 잣대를 벗어버린 순전한 자발적 사랑의 순간을 제시한다. 성애와 동성애, 근친애와 복장도착 등, 다루는 소재들이 관객에게 친숙하지는 않더라도 이런 보편적인 시적 진실과 함께 연극은 고전의 세계로 진입한다.
노이정/연극평론가
voiv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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