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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갈매기와 맥베드
좋은 예술작품이란 평소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근본부터 흔드는 작품이다. 그러면서 그 예술의 진가에 더 깊이 빠져들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마지막 연극인 <갈매기>(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10월28~29일)와 엘지아트센터 초청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맥베드>(11월4~5일)는 연극에 대한 관객의 관념을 뒤흔들어준 충격적이면서도 좋은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두 작품은 색깔이 전혀 다르다. <갈매기>는 테이블 두 개 넓이가 될까 말까한 좁은 공간에서 현대 일상복을 입은 배우들이 의자 몇 개 놓고 체호프의 작품임을 밀어붙이는 공연이고, <맥베드>는 셰익스피어 시가 품은 인생의 은유를 처절하기까지 한 무대 이미지로 끝없이 풀어내는 작품이다. 그런데도 두 작품에는 공통된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배우가 다른 어떤 것(예를 들면 이야기)을 재현하기 위해 무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강한 물질성을 가지고 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연극이라는 점이다. 배우들은 텍스트와 한편 연결되어 있고 한편 독립해 있다. 헝가리 크레타코르 극단의 <갈매기>(아파드 실링 연출)에는 검은 드레스의 마샤도, 자아도취형 여배우 아르카지나도, 지성적 소설가 트리고린도 없다. 청바지에 선머슴 같은 마샤와 육덕 좋고 거침 없는 아줌마 아르카지나, 글쓰는 데만 관심있을 뿐 사회적으론 숙맥 같은 트리고린이 있을 뿐이다. 체호프의 인물들이 신화의 세계에서 내려와 진정한 인간이 된 셈이다. 중요한 상징물인 갈매기는 흰 비닐봉투 안에 들어 있어 깃털만 날린다. 마치 어린왕자가 그린 상자 속의 양 같아 웃음이 난다. 하지만 무대는 심각하다. 배우들은 자기 자신으로 무대에 서서 인물들의 대화 아래 자리한 깊은 인간적 욕망을 서로의 몸으로 확인한다. 한 마디 대사도 몸으로 체험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로토프스키의 육체적 표현의 악보, 칸토르가 만들어낸 가난한 연극의 계보가 여기 살아있음을 본다. 리투아니아 연출가 에이문타스 네크로슈스의 <맥베드>(1999년 초연)에서는 원작의 시적 대사에서 끌어낸 오브제들이 서로 부딪히고 이어지며 이미지의 대향연을 펼치지만 이 오브제들 역시 나무나 톱밥, 재와 연기, 자갈, 놋대야나 도끼 같은 것들이므로 가난하긴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공사판에서 재현되는 중세 신화의 세계다. 함께 공연한 <햄릿>(11월1~2일, 1997년 초연)이 등장인물을 털가죽을 뒤집어쓴 야생동물로 표현했다면, 이 작품속 인물들은 각자 생명의 나무다. 마녀들이 잣는 운명의 실에 묶여 뿌리 뽑히기도 하고 베어지기도 한다. 불의에 저항하는 이들의 생명력이 버남 숲을 움직인다. 연극은 전쟁의 소음과 레퀴엠을 배경으로 마녀들과 맥베드 부부가 벌이는 한판 승부를 보여준다. 무대는 맥베드의 정신의 풍경이고 대사는 맥베드의 모놀로그와 같다. 사실적 행동은 없으며 모든 것이 상징 놀이다. 놀라운 것은 앙상한 대사만이 남은 이미지의 숲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바로 가슴을 울리는 셰익스피어의 시라는 점이다. 노이정/연극평론가 voiv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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