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2.19 17:20
수정 : 2006.12.1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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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의 1940년작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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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없는 사람·비둘기가 된 풀잎·구름덩어리를 담은 와인…
초현실주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 국내 첫 회고전
푸릇푸릇한 풀잎이 비둘기와 올빼미로 슬그머니 변하고, 구름 덩어리가 거대한 와인잔 속에 담기는 세상. 온통 푸른 빛 하늘로 뒤덮인 새 한마리가 적막한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세상. 나무뿌리는 성채가 되며, 이목구비만 남은 미인의 얼굴이 진주 장식 속에서 꿈틀거리고 중절모 신사들이 건물 사이로 둥둥 떠다니는 세상. 거기에선 물고기도 물을 나와 창밖의 바다를 사색하는 철학자가 된다.
철학적 그림 사색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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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작 <붉은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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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초현실주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이런 이상야릇한 풍경이 뭉텅뭉텅 흘러나오는 그림들을 그렸다. 이 지상에는 없는 이 괴상한 풍경들이 행복한 환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만의 매력일 터다. 보았을 법하지만 곧장 잊어버리는 꿈의 풍경들을 작가는 가장 평이한 일상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끄집어낸다. 풍경과 사물의 현상을 그대로 본뜨는 재현의 전통을 꿈을 끌어들여 우아하게 부수어버린 것이다. 마그리트가 지금도 애호가들을 열광시키는 이유다.
가장 우아한 초현실주의 화가로 손꼽히는 이 거장의 그림들이 이땅을 찾아왔다. 20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작한 ‘초현실주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전은 벨기에 왕립미술관과 마그리트 재단의 협력으로 유럽·미국 주요 미술관과 수집가들이 소장한 마그리트의 주요 그림 270여점이 나왔다. 마그리트의 국내 첫 회고전인 이 전시는 일급 컬렉션들의 잔치는 아니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말년까지의 작품 이력을 반영하는 작품들이 망라된데다 그의 행적을 담은 사진과 영상들도 같이 선보인 점이 돋보인다. 마그리트는 여느 초현실작가들과 달리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마구 내뱉지 않고, 사과나 바위, 새, 물고기, 여성 누드 등의 친숙한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이들을 엉뚱한 자리에 배치하는 이른바 ‘데페이즈망’ 기법을 즐겨썼다. 2, 3층 전시장은 이런 작업 이력과 특징들을 시기별로 차분하게 정리하고 있다. 전시 여정은 중절모를 쓴 채 거울을 보는 마그리트의 대형사진을 보면서부터 시작된다. 눈길을 끄는 것이 야구를 하는 사람들 위로 거북이가 둥둥 떠다니는 <보이지 않는 선수>라는 27년 대작이다. 고전적 인물상과 고무장갑을 황막한 도시 풍경 속에 결합시킨 이탈리아 작가 키리코의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 회화를 작업했던 초창기 이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벽지 디자이너 시절 작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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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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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지 디자이너 출신인 그가 30년대 틈틈이 작업한 파리 뮤지컬이나 극장 쇼의 포스터들, 그리고 노동자들을 위해 작업한 집회 포스터들도 같이 나왔다. 야한 눈빛을 빛내며 남성들을 유혹하는 ‘쇼걸’들을 담은 판화 디자인과 실타래, 붉은 깃발들이 특유의 푸른 화면 속에 등장하는 노동자 포스터 등에서 디자인, 그래픽을 함께 고민했던 다기한 작업양상을 엿볼 수 있다. 40년대 르느와르 고흐 같은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거친 붓터치와 원색 색물결로 화면을 뒤덮은 누드나 군상 연작들은 우울한 전쟁기, 인상파에 대한 재성찰을 통해 새로운 출구를 찾아 헤맸던 그의 행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50~60년대 말년기 전시작품들 가운데는 거대한 돌덩이 구조물 안에 꿈이란 불어단어를 채워넣은 <대화의 기술>, 구름을 담은 와인잔을 묘사한 <심금>, 창백한 누드상 등의 낯익은 작품도 있다. 대표작 <빛의 제국>은 소장가가 북핵 문제로 정정이 불안하다는 점을 들어 출품을 거부했으나 주최쪽은 계속 반입 협상을 하는 중이라고 한다. 내년 4월1일까지. (02)332-8182. 1층 전시장에서는 80년대 이후 프랑스의 대표적 신표현주의 작가인 로베르 콩베스의 재기 넘치는 대형 낙서화풍 작업들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제공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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