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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규 <거울 앞>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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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거울 앞에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는 아직 젊은 날의 꿈이 남아있는가, 나에게는 아직 기쁨과 슬픔을 나눌 친구가 남아있가, 나는 이렇게 그냥 나이를 먹어가야 하는가, 여자로 살아가는다는게 무엇인가, 아니 여자로 살아간다는게 이렇게 힘든 것일까? 한애규의 작품세계는 이런 물음들 속에서 시작된다. 여자이기에 물을 수 있는 물음이고, 여자이기에 알 수 있는 답이지만, 남자에게는 물을 수 없는 물음이고, 남자들은 답을 모른다. 그래서 한애규는 작품을 통해 여자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점토로 소꿉장난 하듯 방을 만들고, 거울을 만들고, 여자도 만든 후, 소나무와 떡갈나무 재로 만든 유약(재유)을 칠해 1100-1300도의 뜨거운 가마 불 속으로 들여보낸다. 그 불 속에서, 여자의 삶이 세상에 담금질 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듯, 흙덩이도 도자조각품인 도조가 되어 세상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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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규 <김치담기> 50 x 27 x 31cm 백토 + 샤모트, 재유 소성온도 1300도 1989년.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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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에게는 서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남자는 돈을 벌어와야 하고, 여자는 집안 일을 해야한다. 물론 요즈음에는 맞벌이 부부가 많지만, 여자가 밖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온다고 집안 일이 벗어지거나, 나눠지는 경우는 아직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여자는 밖에서 일을 하던 안하던, 집에서 김치도 담그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아이들도 키우고, 밥도 하고 설겆이도 하는 등 해야 할 일이 밖에 일 못지 않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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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담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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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야할 일이 많은 여자는 피곤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피곤함을 모른다. 아니, 안다해도 그것은 여자의 의무이고, 여자니까 당연히 받아들여야할 숙명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한다.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위로받고 행복해지는 여자지만, 이 세상에는 그 간단함을 모르는 남편이 너무 많다. 돈 벌어다 주는 걸로 가장의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하는 남편이기에 섭섭할 때가 많지만, 여자는 어디에다 하소연도 못하고 그냥 산다. 그래서 여자는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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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규 <장롱속의 여인> 22 x 12.5 x 33cm 백토, 재유 1989년.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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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 속의 여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 섬세하게 만들었다, 재미있게 만들었다, 왜 장롱 속에서 잘까? 여자가 슬퍼 보인다, 답답하다 등, 그 느낌은 보는 사람이 여자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그리고 여자의 삶에 어느정도의 관심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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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속의 여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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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요도 펼치지 않고, 두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장롱 속에서 곤하게 잠을 자고 있다. 그러나 장롱 속에서 여자가 잠을 자는 모습은 현실에서의 모습이 아니다. 작가가 이렇게 상상력으로 작품구도를 설정했을 때는, 이렇게 보여줘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첫번째 소개한 <거울 앞>이 여자가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는 구체적 작품이라면, <장롱 속의 여인>은 작가가 사회에다 물음을 던지는 은유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여자를 장롱 속에서 잠을 자게 하였을까? 그 답은 여자가 잠을 자고 있는 장롱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장롱은 여자들이 결혼할 때 해오는 대표적인 혼수, 곧 결혼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여자의 모습을 장롱 속에 담았고, 여자의 표정에는 피곤함이 담겨있는 것이다. 한애규는 자신의 80년대 작품에 대해 어느 인터뷰에서 "여자의 일상을 쏟아내면서, 나처럼 속앓이 하는 여성들을 대변하려고 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한애규인 동시에 이 사회 속의 여자들인 것이다. 이렇게 한 개인의 삶의 모습을 통하여 이 사회의 많은 여자들의 삶의 모습을 느끼게 하는 능력이 바로 한애규의 작가적 재능이고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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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규 <즐거운 우리집 - 불화> 48 x 35 x 32cm 테라코타 1100도 1993년.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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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자의 삶에는 피곤함 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 상당수의 여자들은 오늘도 이 시간에도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통계가 비교적 정확하다는 미국의 경우, 여자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가정폭력을 당해본 경우가 40%를 웃돈다. 우리나라는 통계수치를 떠나, 여자와 북어는 두들길 수록 제 맛이 난다는 말이 속담처럼 떠돌고, 가정폭력을 당한 유명인들의 사진도 간간이 신문에 실린다. 이렇게 가끔씩 가정폭력 문제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해도 며칠 지나면 잠잠해지고, 폭력을 휘두른 남자가 감옥엘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매맞은 사진을 바라보는 남자들 중에는,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았을거다, 맞을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맞았을거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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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우리집 - 불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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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맞을 만한 짓', '맞을만한 이유'는 남자들에게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땅의 수많은 유흥업소와 안마시술소, 집창촌에 드나드는 남자들의 대부분은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남자들은 '너희가 스트레스를 아느냐?" '너희가 접대의 의무를 아느냐?'라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행하고 합리화 시킨다. 그리고는 집에 들어와, 술김에, 홧김에, 습관 때문에, 잔소리 해서 등의 갖가지 이유로 주먹을 휘두르는 남자가 많다. 그렇지만 법을 바꿀 수 있는 국회의원들도, 법을 집행하는 검사들도, 가정폭력을 판결하는 판사들도, 가정폭력은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자들은 하소연할데가 거의 없다. 남편이 휘두른 주먹에 나동그라진 여자가 창문 밖으로 옆어져있다. 작가는 이 부분에서 여자의 참혹한 얼굴이 보이지 않게함으로써 감정의 노출을 극도로 절제시켰고, 이러한 감정의 절제를 통하여 작품의 촛점을 폭력을 상징하는 주먹에 맞췄다. 그리고는 작품의 명제를 '즐거운 우리집'이라고 했다. 참으로 대단한 풍자요, 남자들을 향한 비아냥일 뿐 아니라, 밖에 나가서는 우리집 행복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여자들의 아픔과 슬픔에 대한 은유다. 그래서 한애규의 <즐거운 우리집> 연작에는 처절한 아픔과 슬픔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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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규 <즐거운 우리집 - 평정> 33 x 29 x 27cm 테라코타 1100도 1993년.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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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우리집'이 '평정'을 찾았다. 커피잔이 뒹굴면서 커피가 쏟아졌고, 집이 기울어질 정도의 소란이 있었지만, 남편은 출근했고, 여자는 지친 모습으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며, 이렇게 살아야하는 것일까? 라는 참담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이 작품은 한애규가 작품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라해도 과언이 아니고, 여자의 삶의 한부분에 대한 보편성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봐도 쉽게 이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성을 동시에 획득한 득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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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우리집 - 평정>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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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눈을 감고 멍하게 앉아있다. 분노하고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냐는듯, 고개를 젖힌 모습에서 체념이 느껴진다. 체념, 그것은 '절대 고독'이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하늘을 바라보아도 희망이 없는, 폭풍우와 거센 파도가 몰아쳐도 아무도 구해줄 사람이 없는 그 '절대 고독' 속에서, 여자는 아슬아슬하게 지붕 모퉁이에 앉아 눈을 감고있다. 그러나 남자들은 묻지 않는다. 누가 저 여자를 지붕 위에 올려 놓았느냐고. 그리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누가 저 여인을 지붕에서 내려오게 할 수 있지를... 그래서 여자는 스스로 내려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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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규 <집을 점령한 여인> 65 x 37 x 41cm 1989년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청자토 + 테라코타점토 + 샤모트 소성온도 1100도, 청자토 + 샤모트 소성온도 1290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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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을 딛고 지붕에서 내려온 여자는 다시 가정을 지킨다. 그 이유는 남편에 대한 미련 때문일 수도 있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 일 수도 있고, 이혼녀로 살아가기 싫거나,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어떤 여자는 남편이 칼 들고 죽이겠다고 찔렀는데 간신히 살아나서도 이혼하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그냥 산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냥 산다고 살아지는 것인가. 살려고 발버둥쳐야 살아지는게 이 험한 세상 아니겠는가. 그래서 여자는 남들이 뭐라든 상관없이 동네 미장원에 가서 머리도 짧게 자르고, 궁상맞지 않게 어깨도 펴고, '반짝 세일'하는 물건을 움켜잡기 위하여 팔을 걷어 부친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변신하지 않으면, 남편에게 당하고, 세상에게 당하기만 하니까... 한애규는 그런 아줌마의 모습을 황토빛 테라코타로 표현하면서, 지붕 위에 아줌마 깃발을 꼿고, 앞마당에 꽃도 심고, 뒷마당에는 꿋꿋함을 상징하는 대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감을 말하기 위해 머리 사이사이에 하얀색을 칠했고, 여자의 얼굴을 중성화 시켰다. 그렇다. 작가는 여자지만 어쩌면 여자가 아닐 수도 있는 아줌마를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줌마의 굳게 다문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줌마가 이 시대의 자식들을 키웠고, 그 자식들이 이 사회를 발전시켰고 이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다. 그래서 아줌마는 우리 사회의 원동력이고, 미래의 희망이다. 그러나 남자들은 모른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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