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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2.02 09:42 수정 : 2007.02.02 16:22

공포영화 ‘신데렐라’ 음악감독, 현진영이 자신의 신곡을 열창하고 있다.

"새 장르 갖고 나와서 원숭이 취급 받은 적이 많았어요. 이 앨범도 반신반의했습니다. 걱정 반 근심 반이었어요."

조심스러웠다. 말투도 조심스러웠고, 세상의 시선도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말문이 터지자 봇물이다. 그동안 쉽게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는 그만의 아픔과 이야기가 산을 이루고 있었던 것.

국내에 힙합을 본격 도입한 후 늘 실험적인 장르로 주목받은 현진영(36)이 '재즈힙합'이라는 다소 생소한 장르의 음악을 들고 돌아왔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무려 13년의 공부 끝에 내 놓은 결과물이다.

최근 온라인 등에서 반향을 일으키는 '소리쳐봐'가 담긴 '뉴 재즈힙합 리턴 1집-스트리트 재즈 인 마이 솔(New Jazz Hiphop Return Vol.1-Street Jazz In My Soul)'. 그로서는 2002년 4집과 2006년 5집 '스트리트 재즈 인 마이 솔' 이후 새 음반이다. 그런데 재즈 음반 1집인 이번 앨범은 5집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새 장르에 대한 부담이 있었던 만큼 예행연습으로 작년 초 5집을 먼저 냈죠. 이번에 5집의 '브레이크 미 다운(Break Me Down)'을 다시 불러 녹음했어요. 그게 '소리쳐봐'입니다. 이번 앨범이 비로소 재즈힙합으로 낸 1집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최근 무려 9년 만에 지상파 가요순위프로그램 무대에 서기도 했다. 오랜만에 방송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에게 팬들은 따뜻한 격려를 보내고 있다. '진정한 뮤지션, 당신을 응원한다'는 등의 말을 온라인에서 건내는 것.

"그 가요프로그램에서 팬들의 환호에 울컥했다"는 그를 만나 그가 시도한 음악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재즈힙합 = 1993년 3집 음반의 '바로 너'를 통해 재즈힙합을 '살짝' 선보였다. 이후 진정으로 재즈힙합을 공부하겠다며 지금까지 매달렸다.

현진영의 설명에 따르면 힙합은 규정된 장르가 아니라 재즈의 스윙에서 파생된 비트다. 미국 래퍼가 이 비트에 예전 재즈 음악의 테마를 루핑(한두 마디의 소절을 반복하는 것)해서 인기를 얻었고 장르처럼 받아들여졌다는 것.

힙합은 태생부터 재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설명이다. 또 이미 미국 등에서는 재즈힙합이라는 장르가 1970~80년대부터 유행했다.

현진영은 "재즈의 스윙 시대와 비밥 시대 사이에 선보였던 스캣(가사 대신 즉흥적으로 뜻 없이 흥얼거리는 노래) 위주의 음악에서 모티브를 얻어 재즈힙합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재즈힙합일까.

그는 "재즈피아니스트인 아버지(허병찬)로부터 '내 뒤를 따르기를 바랐는데 네 고집만 부리는 음악만 하는구나'라는 말을 들은 것이 계기"라며 "또 힙합 개념 등을 후배에게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이 있었는데, 이 음반을 통해 제대로 모른 채 힙합을 하는 친구들이 잘 알고 다시 시작하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 아버지 = 대표적인 재즈힙합곡인 '소리쳐봐'를 무려 47번이나 편곡을 바꿔 녹음을 다시했다. 그의 아버지가 "이래 갖고 네가 대중에게 어필하겠냐" "네가 재즈 뮤지션이냐" "이 음악이 동요냐"는 등의 이유로 계속 다시 만들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재즈에 맞는 중저음 목소리로 녹음하기 위해 체중을 130㎏까지 불렸다가 빼는 노력을 했지만 끝까지 아버지로부터 '오케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현진영에게 화두만 남긴 채 2005년 사망했다.

그는 "내가 죽으면 아버지에게 그때 왜 그랬느냐고 꼭 묻고 싶다"며 "아마도 내 재즈의 깊이가 부족하다고 느끼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현진영은 "일본에서 공부하신 아버지는 미8군 재즈악단을 만드셨고 사비를 들여 공연을 하셨는데 내가 태어나면서 재즈계를 떠나셨다"며 "아버지는 늘 내 음악을 가장 먼저 듣고 평을 해주는 음악친구였다"고 말했다.

◇ 작곡가 사단 = 현진영은 1998년 '메이드인 H.J.Y 뮤직'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작곡가 후배를 양성하고 있다. 현재 이 회사에는 37명의 작곡가가 소속됐다.

한 동안 '밤무대'를 뛰어 번 돈으로 운영 경비를 댈 정도로 이 회사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덕분에 회사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가수 지망생들도 제 발로 찾아와 현재 11팀이 가수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

"영화음악 100곡을 일주일 만에 만들어 내는 조직력을 갖춘 집단입니다. 계약기간 동안 저작권료는 작곡가 본인이 갖고, 회사는 판권과 저작권을 갖는 식으로 운영되죠. 1년에 두 번씩 가지치기(인원 정리)를 하지만 소속 인원이 30명 아래로 내려가지는 않습니다."

그는 그가 이끄는 작곡가 사단과 함께 OCN의 TV 영화 '동상이몽'을 비롯해 영화 '신데렐라'의 음악 감독을 맡아 호평을 받은 바 있다.

◇ 힘들었던 과거 = 그는 1990년 데뷔 후 '슬픈 마네킹' '흐린 기억 속의 그대' 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손대지 말았어야 할 '마약'과 접촉하는 바람에 수차례 구속되는 아픔도 겪었다.

고통스러운 터널을 빠져 나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마약 공개 치료를 받기도 했고, 마약 퇴치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심각한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결국 사서 고생을 한 것이죠. 그 시절이 내 음악적 거름이 돼 남보다 더 애절하고 의미 있는 음악을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마약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00년부터 절실하게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어요. 내가 여러 번 고난을 겪을 동안 하나님은 나를 어디엔가 다시 사용하기 위해 지켜보고 계셨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나는 정신병원에 있었던 것을 계기로 지체장애인을 위한 치료음악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현재 임상실험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이어 그는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듣고 나의 좋은 것은 갖고 가고 나쁜 것은 피해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김영현 기자 cool@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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