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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2.25 17:28 수정 : 2007.02.25 17:28

‘사도’

리뷰

대영박물관이 미이라를 사랑하듯이 국립중앙박물관도 ‘네크로필리아’에 빠진 것인가. 국수호의 <사도(2월 24일 극장 용)는 일찌감치 ‘박제’가 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르네상스’의 내면에 깔린 사도세자의 비극을 음악이 있는 춤극으로 그린다는 의도는 그 역사에의 턱없는 무지와 몰취미, 몰개성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전망과 재해석이 실종된 공연은 소재주의에 기댈 뿐이다.

일단 무대의 허공에 주인없는 의상이 내걸렸는데, 배역 각각의 이미지를 부조하기보다 막연히 전시하기에 가까웠다. 아니나 다를까, 막이 오르자 음악과 춤이 만난다는 이 공연의 공허감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불화를 묘사하는 과정은 앙상하다. 함께 호흡을 맞추던 왕과 세자가 왜 갑자기 틀어지는지 알 수 없다. 진실의 잔혹성에 접근하려는 조그마한 시도도 원치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사도’를 참칭할 이유가 있을까.

음악은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연주에다 노래가 곁들여졌는데, 중언부언에 가까웠다. 가령,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가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은 재미없는 통속성의 극치였고, 바닥에 돌아누운 그들을 향한 노래는 “사랑이었네, 생사를 넘은 사랑이었네.” 라며 확인사살해주는 식이었다. 연주 역시 이 각 배역의 심리적 흐름을 설명하기에 바빴는데, 구차한 일차원이었다. 소위 ‘반주음악’의 수준으로 하향해버리는 미의식이 무대음악의 본령인지 묻고 싶다.

모든 것은 역부족인 안무 때문이다. 춤 자체의 섬세한 고안이나 배치가 없으니, 그저 감정을 표현하는 과장으로 치달을 뿐이다. 그 과장은 후반으로 갈수록 자기도취에 빠지면서 척척 늘어지고 공허해진다. 영화로 치면, 남기남 감독식의 연출이기 때문이다. ‘사랑’ ‘슬픔’ ‘분노’를 맥락없이 주문하고, 진부하게 재현하니까. 세계적인 발레리나 김주원 역시 특징없는 안무 속에서 헛심만 쓴 격이다.

안무가 국수호가 득의의 표현으로 삼은 것은 사도세자가 갇혀죽은 뒤주를 물이 있는 공간으로 바꾼 정도이다. 사도세자가 풍덩 빠지는 액션으로 죽음을 형상화한다는 장면인데, 전혀 신선하지 않다. 이미 많은 시도에 의해 진부해진 설치라는 사실에 둔감하다. 죽음 자체에 강세를 두기보다는 비극을 둘러싼 관계와 변화를 다뤄야 하지 않았을까.

결국 아버지, 아들, 며느리, 손자라는 밋밋한 가족사로 내려앉히는 이 익명의 비극을 향해 ‘사도’라고 이름붙이는 것은 지나치다. 이미 <고구려>라는 ‘가장무도회’ 공연을 통해 에누리없이 창작의 빈곤을 보여줬던 국수호는 이 조악한 작품으로 재확인시키고 있다. 춤의 진지한 자기성찰 없이 밀어붙이기식의 일방통행으로 공연예술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흐름이 슬프다.

김남수 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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