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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10 17:33 수정 : 2007.04.10 17:56

지난 달, 전시회가 오픈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나는 서둘러 앤디 워홀의 작품들과의 만남을 위해 몇몇 동지(?)들과 함께 리움미술관을 찾았다. 제법 한가한 감상을 즐기며 함께 한 사람들과 제법 많은 얘기를 나누기 위해 평일 오전에 그것도 개장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다. 그러나 서너 작품을 둘러보며 이제 막 워홀의 작품 세계에 대하여 진지한 대화를 나눌 즈음, 우리는 관객들의 흐름에 밀려 작품의 의미들을 서둘러 지나쳐 가야만 했다. 워홀의 명성이 관객들을 불러 모은 것이 분명했다.

이 날 리움과 워홀, 그리고 관객들의 상관관계를 고려해 볼 때 솔직히 몇 가지 요소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 삼성과 같은 거대 자본에 의해서 운영되는 비대중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리움(Leeum)에서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작품들을 가지고 전시회(“앤디 워홀 팩토리”전) 연다는 것이 우선 그랬고, 6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의 스피릿(spirit)을 가진 워홀의 정신에 한국의 관객들이 열광한다는 것이 또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워홀의 작품을 보기 위해 몰려든 관객들 중 강남 아줌마들이 많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움과 의아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삼성 리움과 앤디 워홀에 각각 함의된 이미지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접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삼성의 이미지는 대중적인 것과 관계가 멀다. 일류 기업을 목표로 엘리트주의를 추구하는 삼성의 의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1등 시민을 표방하는 부르주아적 이미지를 대표한다. 사설 미술관으로서 리움은 그러한 삼성의 부르주아적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문화 공간이었다. 그에 비하면 워홀의 작품들은 매우 대중적이다. 그는 늘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이미지들을 재생산하여 그 익숙한 이미지들로서 최고의 예술을 대중에게 바쳤다. 그로 인해 이제 대중들은 최고의 예술을 만나기 위해 이해하기도 힘들고 불편하고 어색한 입체주의나 초현실주의 혹은 실험주의 예술을 동경할 필요가 없어졌다. 팝아트의 실현으로 이제 최고의 예술은 바로 자신들의 세계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특권 계층이 최고의 예술을 접하기 위해 대중들의 삶의 공간으로 내려와야 할 판이었다. 1960년대 미국 사회가 앤디 워홀에게 열광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처럼 삼성과 워홀이 대립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리움의 “워홀”전은 그 부조화를 넘어서는 조화의 미학을 멋지게 구현하고 있다. 바로 상업주의가 그것이다. 삼성의 입장에서 볼 때 워홀은 자기들의 특권의 세계를 구현하도록 대중들은 인도하는 선지자와 같은 존재였다. 워홀이 그려낸 “브릴로 상자,” “캠벨 수프 통조림,” “코카콜라병” 등은 상업주의의 부정성을 예술로 승화시켜 대중 앞에 새로운 가치와 미덕을 설교하였다. 이로 인해 워홀 자신은 대중을 위하여 대중의 시각으로 최고의 예술이 구현될 수 있다는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었음에 틀림없었을 저 팝아트가 결과적으로는 상업주의를 미화하는 역설적인 도구가 되고 말았다. 워홀과 더불어 대중들은 상업주의의 모든 부정으로부터 예술의 가치를 발견하고는 불꽃으로 달려드는 나방들과 같이 그리로 달려들었다. 삼성은 바로 그러한 워홀의 역설을 이용하여 대중들을 상업주의적 예술의 환상 속으로 초대하여 대자본 기업이 가지는 부정적 요인을 제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삼성의 귀족적 이미지와 워홀의 팝아트는 절묘한 동반자적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6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와 국내 관객들과의 정신적 상관성은 또 어떤가? “앤디 워홀의 팩토리전”을 관람하는 내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은 물음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21세기를 사는 한국의 관객들이 6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에 감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리 살펴봐도 워홀의 작품들은 그 자체에는 열광할만한 예술적 의미가 별로 없어 보였다. 다만 그가 작품을 통해 표방하고자 하는 어떤 궁극적인 행위에 들어 있는 메시지가 주목을 받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대중들의 세계 속에 예술의 가치가 들어 있음을 선포함으로써 불편했던 예술과의 관계를 회복시킨 것이 바로 우리가 그에게 감탄하는 이유이다. 이 외에도 대중적 이미지의 허상을 벗겨버림으로써 대중과 분리된 스타나 관심사가 아닌 대중 그 자체가 주체임을 역설하고자 한 철저히 대중의 편에 선 그의 노력이 그의 미학적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상품을 모방하고 대중 스타들의 이미지를 대량으로 생산해 내었다. 대중스타의 본질을 벗겨내고 그 이미지를 탈 우상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는 늘 대중 스타들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관객들은 그의 탈 이미지화에 동화되기 보다는 무수히 복제된 그 스타들의 이미지들 속에서 또 다시 스타의 이미지를 꿈꾼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들에게는 그 시대의 대중문화에 대한 또 다른 환상과 동경을 만들어 낸다. 이런 정신적인 재생의 과정이 그의 작품으로 대중들을 이끄는 마력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 미국의 대중문화에 열광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단지 앤디 워홀이 그 시대에 가졌던 탁월한 예술적 분석력과 창조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가 일상의 이미지들을 무한 복제해내고, 아트리에도 아닌 공장(factory)에서 당시의 예술계와 대중성이란 화두로 투쟁하고자 했던 그 시대정신을 읽어야만 한다. 그러한 그의 시대적 통찰력이 지금 우리에게와 우리 자녀들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활용될 수 있는 지 파악함으로써 그의 예술적 가치를 다만 오늘 우리시대의 반면 거울로 삼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앤디 워홀의 작품 앞에 서는 당위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관객들은 워홀이 반복해서 생산해낸 6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 그 자체로부터는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나를 정말로 놀라게 만든 강남의 아줌마들! 그날 나도 그들과 함께 리움을 찾았고, 그들에게 워홀의 정신세계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니 정말 많은 아줌마들이 전시회장을 찾았다. 물론 평일 오전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작년 연말에 르네 마그리트전이 진행되었던 서울시립미술관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에 저들의 문화 참여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주었다. 내가 저들을 강남의 아줌마들로 판단한 것 자체는 물론 비약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많은 구성원들은 강남 아줌마들이었거나 또는 그들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구성원들이었을 것이다. 설사 그 추측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나와 함께 한 그분들은 강남의 아줌마들이 틀림없었다. 내가 저들을 강남 아줌마들로 규정하고자 하는 이유는 저들과 앤디 워홀의 정신을 대조하고자 하는 나의 글쓰기 의도 때문이다. 강남아줌마들과 앤디 워홀! 그 불편한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강남아줌마는 보수적 이미지를 대표한다. 저들의 차별화된 의식은 자녀교육과 부동산투기와 정치 이데올로기 및 여가 문화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강남이라는 이미지에서 반영되듯이 저들은 이미 대중화, 또는 보편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언제나 우리 사회의 특권 계층으로서 그 지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매우 능동적으로 사회의 모순을 창출해 내는 주체들이다. 저들의 이러한 보수적 행위는 어느 정도 세습화의 과정에도 성공하고 있어 대중세계와의 질적 분리를 더욱 더 구체화시키고 있다. 때문에 저들은 진보적 변화나 개혁을 싫어하고, 사회 구조와 체계가 바뀌지 않도록 저들의 세계를 더욱 더 공고히 하는 일련의 특권의식을 발현한다. 그런 저들이 앤디 워홀 앞에서는 아무런 경계의식도 같지 않고 그 탈구조적 자유에 매료된 관객이 되어 서 있다.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대중매체가 가지는 대중적 저속성을 피하기 위해 텔레비전을 보는 대신 강아지를 키우는 강남의 정서를 가지고 마릴린 먼로의 탈정체화된 이미지 앞에서 저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대중적 환상을 비웃으며 미소를 지었을까? 아니면 원본과 사본의 경계를 무너뜨린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의 통찰력에 찬사를 보냈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앤디 워홀의 유명작 앞에 섰다는 만족감에 뿌듯했을까? 나름대로 작가와 작품의 의미를 공부하고 그 자리에 섰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들은 워홀의 세계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의 작품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저들은 워홀의 작품을 만난 감동과 더불어 전시시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저들은 그의 작품에 드러난 앤디 워홀의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워홀의 진보적 사고와 강남 아줌마들의 보수적 정신세계는 아무리 비교해도 동질성을 찾기 어렵다. 그것은 삼성과 워홀과의 관계와는 사뭇 다르다. 저들이 워홀을 이용해 자신들의 왕국을 구축할만한 실용적인 요소는 없다. 사실 작품 앞에선 저들은 워홀이 외치는 대중성과 무한 자율성 등 진보의 기별과 늘 불편한 관계에 서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워홀은 마오쩌뚱이나 레닌과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이미지를 많이 복제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불편하게 여기는 저들의 대중화된 이미지는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벗기기 위한 워홀의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반영해준다. 그런 워홀의 메시지를 자본주의적 사유체계로 무장한 강남의 아줌마들이 태연하게 들을 수 있을까? 식상한 대중적 이미지들과 동성애의 코드와 사회적 일탈에 대한 워홀의 세계를 어색해하지 않는 저들의 본 모습은 도대체 무엇인가?

워홀의 작품 앞에 선 강남 아줌마들을 바라보면서 난 또 다른 의미에서의 해체된 이미지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 앞에선 저들은 탈정체화, 몰개성화된 존재들이 된다. 워홀은 비록 죽었지만 그는 여전히 40여년이 지난 오늘 서울의 중심에서 강남 아줌마라는 이미지의 해체를 여전히 실현시키고 있다. 과연 그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음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들은 과연 그것을 인식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워홀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의 모순된 정체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그저 워홀 앞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무의미한 이미지만 계속 그려낼 것이다. 자신들은 여전히 특권을 가진 계층이며, 그 특권을 세습되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변화나 탈구조적 자유를 거부하는 강남 아줌마들! 그러면서 워홀 앞에서 만족해하는 저들을 이해하기가 워홀의 작품보다 더 힘들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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