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4.15 18:39
수정 : 2007.04.15 18:40
[리뷰] 이사벨라의 방
주름 따위는 없애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깊고 우묵한 주름 속에 접힌 삶의 두루마리를 펼쳐내는 공연이 있었다. 벨기에 니드컴퍼니의 〈이사벨라의 방〉(3월30일~4월1일·엘지아트센터)은 한 늙은 여인의 주름진 몸에 깃든 지난 살림살이의 기억을 ‘지금 여기’의 체험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93살의 눈먼 이사벨라가 사랑했던 망자들과 삶의 비밀을 고백하는 시간을 갖는다. 기억은 단순히 반복되지 않고,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소동과 정감 있는 변주를 낳았다. 표현 형식도 자유로워서 이야기판에서 노래판으로, 노래판에서 춤판으로, 그리고 삶의 열정을 전염시키는 난장으로 돌고 돌았다.
무대에는 가로축 가득히 마스크, 목각인형, 칼과 벽화 같은 아프리카 유물이 깔렸다. 그 선율적 풍경은 명백히 유럽이 약탈과 신비로 대접했던 아프리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런데 이 공연은 ‘정치적 올바름’의 태도가 형식적이라고 여겼는지, 이사벨라가 어떻게 아프리카를 사랑하고 동경했는가에만 초점을 맞춘다. 자신이 ‘사막의 공주’였다는 판타지를 품고, 인류학자가 되고, 젊은 연인이 아프리카로 인해 죽었다는 것. 이사벨라의 개인사가 근대 아프리카의 비극과 어떻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펜을 꺾은 랭보가 콩고의 노예상인이었고, 피카소가 전사의 마스크에서 영감을 훔쳤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 아프리카 취미는 용납되는 것일까. 이 공연은 이렇게 지극히 유럽인의 시각으로 20세기의 연대기까지 접수하고 있다. 시대의 조류를 타면서 그 휴머니즘의 붕괴와 폭력 그리고 전쟁을 증언하는 것은 성찰의 기본 태도다. 가령, 이사벨라가 사랑하는 알렉산더가 히로시마 원폭의 악몽에 시달리며 절규하는 연기나 우주공간에 개를 실어보낸 인공위성을 풍자하는 퍼포먼스는 상당한 밀도가 있었다.
하지만 비인간의 극한 속에서 사랑과 열정을 불태우는 리듬적 인물들이 “이 삶을 다시 한번 더!”라며 축제를 벌이는 것으로 이 역사적 조망은 뜻깊어지는 것일까.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보여줬던 소통불능의 현실은 이제 망각해도 좋은 것일까. 이 공연에 가득한 낙관적인 유러피언 드림 혹은 삶의 관용과 화해는 지나치게 유럽 중심적인 데가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 공연이 가진 문법은 낡은 장르적 구분을 넘어 새로운 혼돈의 에너지를 품은 질서로 나아가고 있다. 21세기의 바닥으로 지속되고 있는 지난 역사를 굽어보며, 존재 망각의 현재를 퍼뜩 일깨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의 공연예술이 가졌던 지구촌 단위의 화두 생산이 아니라 유럽 단위의 성찰이란 점이 못내 아쉽다.
김남수/무용평론가
anacroid@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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