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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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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작품들이나 작가들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평가를 할 수는 없고 다만 작품들의 전체적인 수준들을 통해서 현대 미술의 흐름이나 동향, 작가들의 아우라의 원천 등을 언급할 수는 있겠다. 무엇보다도 내게는 현대 작가들의 예술적 실험 정신이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나의 미술 실력이 대부분 르네상스나 바로코, 로코코 등 고전주의와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등 근대주의적 화풍들에 대한 인식 정도에 머물거나 마그리트, 바넷 뉴먼 등의 몇몇 현대주의적 작가들에 대한 이해 정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번 아트페어는 현대 미술의 다양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체험함으로써 현대미술에 대한 나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게 해 주는 좋은 기회였음이 틀림없었다. 작가들의 예술적 표현의 대상이라든가 그 방법, 나아가 작품 구현의 소재나 재료들, 표현 기법과 창작 의도 등은 나름대로 새로운 이해를 구축하게 해 주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몇몇 미술 관련 다큐멘터리들을 통해 알게 되었던 현대 작가들의 작품과 직접적인 만남을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리히터, 중국의 장 샤오강, 유민준, 미국의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의 작품들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미술적 관심과 지평을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세계 미술 시장에서 미치고 있는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관람객들은 미술시장이 아닌 자신의 영역에서 새로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지적 동인이 될 것이었다. 내게도 역시 그런 충동이 지나쳐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시간에 맞춰 갔기 때문에 관람 도중에 기획 강연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공간과 좌석이 넓지 않고 참석자들은 많았던 덕분에 카펫 위에 앉아서 편안하게(?) 강연을 들을 수 있었던 그 시간에는 미술비평가 정준모씨의 “그림 값은 어떻게 매겨지나?”의 강연이 진행되었다. 그에 따르면 그림 값이 매겨지는 요인들은 다양하지만 결국 한국 시장에서의 그림 값은 현재 경매 시장이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가 가장 강조한 부분은 한국의 그림시장에서의 가격이 상당히 저평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저평가된 주식 시장에 비해 1/3정도의 수준으로 매우 낮게 평가절하되어 있기 때문에 그림 시장의 투자가치는 매우 높다는 게 그의 강의의 핵심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연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강연 내용은 모두 예술과 상업과의 경계를 알고 싶어 했던 내게 많은 정신적 도전을 주는 것들이었다.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듯이 예술은 예술이고 현실은 현실인 것인가? 그 때 난 미술이라는 거대한 상품의 물결로 출렁대는 거대한 바다를 체험하였다. 아무런 항해 준비도 갖추지 못한 나는 거대한 대양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아트페어가 진행되던 곳이 코엑스의 태평양관과 인도양관이었던 것이 우연이었을까? 난 그곳이 자본주의 시장을 가득채운 현대미술의 바다 속에서 표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작품은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의 진리 소통의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낮 팔리기를 바라는 상품에 불과했다. 작품을 보는 사람들도, 작품을 전시한 사람들도 그곳은 다만 살고 팔기 위한 시장에 불과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사고 싶어 할 작품이 무엇인지를 고르는 것이 관객들의 가장 크고도 중요한 유희였다. 그 시장이라는 바다의 중간에서 마치 수영을 못하는 표류자처럼 떠돌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된 순간 나는 서둘러 그 공간을 빠져나오고 싶었다. 여러 작가들의 작품과 현대 미술의 특징으로부터 받았던 감동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은 채, 시장과 상품과 구매라는 자본주의에 갇힌 현대 영혼의 소외만이 나의 실존인 양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표류하던 나는 싱그런 야자수 나무와 숲의 향기를 뿜어주는 넓찍한 공간에 마련된 한 부스에 도달했다. 수수하고 단촐하게 상업주의의 때에 물들지 않은 싱그런 작품들이 전시된 곳, 그곳은 바로 한국의 신예작가들에 의해 꾸며진 한국신진작가전에 진행되는 곳이었다. 강지만, 김진경, 권진수, 박은성, 서고은, 이경아, 주도양, 한정희, 유영운씨 등 9명의 신진작가들이 ‘영 아티스트 포트폴리오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자신들의 실험주의적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포장된 사물들의 무의미한 배치를 보여준 설치미술에서부터 원고지에 정자체로 또박또박 쓴 영어 알파벳으로 구성된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상업적 목적과는 거리가 먼 실험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그곳은 내게 아트페어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었다. 예술을 예술로서만 말하고자 하는 그 순수함은 사막 한 가운데에서 찾은 오아시스요 망망 대해서에서 느낄 수 있는 대륙의 신선한 바람이었다. 그곳에 들어선 순간 나는 비로소 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미술과 상업의 경계를 찾은 것이다. 그 부스를 한계지은 섹션들이 눈에 보이는 바로 그 경계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인식 속에 그어질 수 있는 진정한 한계선들이 아닐까? 그러면서 예술성과 상업주의는 늘 그렇게 바다와 섬과의 관계처럼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섬으로부터 바다로 나가며 바다 한 가운데서 지칠 때마다 다시 그 섬을 그리워하고 그 섬으로 돌아가고자 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늘 바다와 같은 시장으로의 진출을 꿈꾸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지쳐 쓰려지면 또 다시 예술은 그 섬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렇게 예술과 상업은 섬과 바다의 관계가 되어 우리의 삶의 공간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이렇게 섬과도 같은 신진작가전이 진행되는 공간에 있다 보니 또 다시 작품 감상의 여유가 생겼다. 나는 다시 힘을 얻고 나머지 작품들을 둘러보며 현대 미술의 흐름을 탐색하며 그렇게 2007 한국국제아트페어의 체험을 마쳤다. 기획전이 열리는 미술관에서의 관람과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른 이번 아트페어에 참여하면서 나는 미술의 영역에서의 바다와 사막을 체험했으며, 그곳에 존재하는 섬과 오아시스를 발견하였다. 이처럼 아트페어는 내게 인생의 교훈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동료에게 들려준다면 내게 초청장을 가져다 준 그 동료는 기뻐할 것이며, 삶의 오아시스가 어디에 있는지를 또 다시 발견하게 될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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