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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2.14 19:24 수정 : 2008.02.14 19:24

강요배 개인전 ‘스침’

강요배 개인전 ‘스침’

거칠고 주름진 팽나무·돌하루방
보드랍고 탐스런 오름·물 무늬
질감 풍부한 풍경에 ‘세월’ 새겨

강요배의 ‘팽나무’에는 팽나무가 없다. 아니, 구불구불한 팽나무 형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팽나무가 아니라 수백년 세월과의 경계다. 또 꺼칠한 갈색 거죽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허공을 가득 메운 대기와의 경계다.

“싹은 꽃이 되고 줄기는 나무가 된다. 그러한 변화상은 에너지 곧 바람과 햇볕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겉모습에 집착하면 본질을 놓친다.”

강요배 개인전 ‘스침’이 소격동 학고재에서 4일부터 26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온통 풍경이다. 팽나무와 바다와 폭포와 달과 오름과 돌하루방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다. 제주의 햇볕과 바람이 만들어낸 팽나무와 바다와 폭포와 오름과 돌하루방과의 경계다. 전시회에 맞춰 제주에서 올라온 작가는 입이 몹시 무거웠다. 막걸리를 몇 잔 걸치고서야 털어놓은 그의 속내는 무척 깊었다. 생각이 많은 화가답게.

“질감을 결정하면 내 그림의 반은 완성된다. 사물은 질감, 즉 거죽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린 것은 풍경이 아니다. 풍경을 만든 바람과 햇볕도 아니다. 그가 좋아한다는 느낌이다. 성글고 촘촘하고, 따뜻하고 차갑고, 거칠고 부드럽고. 멀리 바다를 건너온, 또는 한라산 오름을 타고 내려온 바로 그 느낌. 만지고 싶을 정도로 간절한 느낌이다. 느낌에 상응하는 질감이 그림의 핵심이라는 얘기다.

강요배 개인전 ‘스침’
■ 그가 이른 경지는 ‘사물= 질감’의 세계.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쉰여섯 해가 소요됐다. 1992년 ‘제주민중항쟁사’, 94년 ‘제주의 자연’, 99년 ‘금강산’, 2003년 ‘강요배’, 2006년 ‘땅에 스민 시간’ 전시회를 거친 다음이다. 저 너머 무엇이 있지 않을까, 뭍에 오른 스무살 청년 강요배가 서울살이 20년 만에 장년이 되어 제주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벌어진 일이다.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 있는 곳이다. 내가 있을 곳은 제주. 나에게 세상의 중심은 제주다.” 제주에 대한 그의 애정은 절대적이다.

몽매의 질감은 ‘제주민중항쟁사’(1992년. 1998년 ‘동백꽃 지다’로 순회전) 프롤로그에 나온다. 늙은 팽나무 아래서 할머니가 손자한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설정. 할머니 이마의 깊은 주름과 마디마다 불거진 손은 팽나무 그대로다. 하지만 주름 아래 눈에는 인자함이, 마디굵은 손등 안쪽에는 따스함이 감춰져 있다.


‘제주민중항쟁사’는 보는 이의 눈물을 쑥 뽑아낼 만큼 격정적이다. 바다를 건너온 외세 즉, 몽고군, 왜구, 프랑스함대, 일본군, 미군 등에 맞선 투쟁. 농기구와 죽창, 동지들의 죽음과 팽나무 아래의 고문 등.

그 후 그의 그림에서 사람들이 사라졌다. 언뜻 풍경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은 배경으로 스며들어 풀과 나무를 뒤흔드는 바람과 파도치는 성난 바다와 역광으로 요동치는 구름이 되었다. 불타는 횃불은 서정적인 집어등 불빛으로, 땅에 스민 피는 붉은 칸나로 피어났다. 2006년 ‘땅에 스민 시간’에 이르러 작가의 내면에 부는 바람은 비로소 잦아들었다. 이번 전시의 ‘홍월’은 유일한 잔흔으로 읽힌다.

“사물은 무늬가 있다. 그런데 붓만으로는 안된다. 붓은 붓만큼만 말할 뿐이다.” 그는 대상 자체로써 그리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바람에 일렁이는 소나무는 솔가지로, 천년 세월을 지켜온 현무암 돌하루방은 거친 석필로, 밀려와 갯바위에 부닥치는 파도는 구겨진 종이로, 소를 향해 내려꽂히는 폭포수는 같은 속도의 붓놀림으로.

그는 스스로 번역자임을 자처한다. 제주의 느낌 관객한테 전하는 번역자.

그의 작품에서 읽히는 또다른 모습은 달덩이 같은 아내. 풍만한 가슴을 연상케하는 오름, 따스한 물무늬, 토끼와 항아가 나오는 달 등. 작가는 막판에 합석한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작품 중에 제주의 상징인 한라산이 없다! (1989년 겁없이 그린 한 점이 있을 뿐이다.) 그의 작업실에서는 아주 잘 보인다는데 말이다. 그는 팽나무, 바다, 오름, 달, 폭포, 돌하루방은 한라산을 그리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팽나무 바다 오름 달 폭포 돌하루방이라는 테두리로써 한라산을 이미 그렸는지 모른다. 다만 범인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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