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1.13 19:00
수정 : 2009.01.13 19:13
[리뷰] 뮤지컬 ‘렌트’
1996년 1월,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에 있는 오프-브로드웨이 극장인 뉴욕 시어터 워크숍에서 뮤지컬 <렌트>가 공연을 시작했을 때 그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극중 대사인 “엔젤이 만들어 입은 치마는 바로 갭의 히트상품이 된다”는 것도 더 이상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시 뉴욕을 싹 갈아엎으며 부동산 값을 올려댄 줄리아니 시장은 예술가들에게는 흡혈귀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뮤지컬 <렌트>에 보내는 환호는 부자를 위한 도시로 만들려는 시장에게 보내는 항의이기도 했다. 이 작품 하나로 주연배우들은 단숨에 스타가 됐고, 단일 무대의 이 단출한 공연은 그 형식 자체에 막다른 골목에 몰려도 온몸을 던져 벽을 부수려는 젊은이들의 열정이 담겨 있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났다. 브로드웨이에서는 공연 12년 만인 지난해 가을 막을 내렸지만 한국에서는 다시 공연(1월9일~2월8일 한전아트센터)을 시작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정말로 많은 것이 변했다. 상상해 보라. 삼십대 중반의 미미와 로저를.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며 살아왔는데 ‘늙어 죽을 수 있다’는 ‘선고’를 들은 그들을. 에이즈는 더 이상 천형도 불치병도 아닌 ‘만성질환’의 일종이 됐고, 그 때문에 무대 위의 배우들이 외치는 ‘오늘’은 한물 간 클리셰나 신파처럼 들린다.
백 년 전 이야기라면 모를까, 바로 어제 같은 시대를 담고 있는 공연이라면 새로 올릴 때는 조금이라도 신선한 향기가 첨가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배우들의 노래는 모두 훌륭하지만 그들은 그저 오리지널 캐스트 앨범에 담긴 창법 그대로 단지 한국말로 부를 뿐이다. 배우가 바뀌었을 때 기대하는 그들만의 캐릭터에 대한 해석도 없다. 한국에서 그토록 많이 공연되었어도 여전히 <렌트>는 ‘번역’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가사의 번역 역시 곡마다 편차가 크다. 무리하게 우겨넣은 ‘…이야’의 줄임말인 ‘야’는 반복될수록 듣기가 거북하여 차라리 듣기라도 편하게 명사로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반면 즐거운 발견도 있다. 모린 역의 최혜진은 가냘픈 몸매에 어울리지 않는 당찬 모습과 더불어 모린 역에서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귀여움을 보여주었다. 콜린 역의 최재림은 경력 한 줄 없는 배우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좋은 목소리와 그리 긴장하지 않는 연기로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끔 해주었다. 누가 뭐래도 <렌트>의 매력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이왕 ‘렌트’한 거 옷이 아니라 육체에 빙의된 영혼처럼 신나게 놀며 미래를 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수진/뮤지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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