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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어머니는 으므니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의 자궁에서 비롯하여 작가가 커가면서 그는 쪼그라들고 색이 바래 결국은 푸석푸석 사라졌기 때문이다. <으므니>는 노모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이 땅의 아들로서 기록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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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일 사진전
“사진이란 무엇인가?” 새내기한테는 질문이지만 50대 중반의 사진가한테는 화두일 터다. 오랫동안 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쳤고 2009년 동강사진상을 받은 이상일씨한테 그것은 ‘나는 무엇인가’와 동의어다.
그의 개인전이 강원도 영월 학생체육관에서 동강사진축제의 하나로 이달 말까지 열리고 있다. 지난 14일부터는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또다른 개인전이 시작돼 10월 말까지 계속된다. 영월에서는 <망월동>(1984~2000), <으므니>(1984~1995), <메멘토모리>(1992~2003), <오온>(2007~2009) 시리즈를, 부산에서는 <으므니>, <고향>(1984), <오온> 시리즈를 선보인다. 전시는 물음인 동시에 나름의 답변이다.
100×200cm 대작 ‘오온’ 등 영월·부산서망월동→온산공단→범어사 관념적 시선 주목 <오온> 시리즈는 새벽 3시 부산 범어사에서 찍은 것으로 100×200㎝ 크기의 대형 작품들이다. 정상적인 거리, 즉 대각선의 1.5배인 3.5m 내외에서 바라보면 거무튀튀해서 찍힌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거나, 무엇처럼 보일 따름이다. 새벽 3시에 삼라만상은 어둠 속에서 깊은 잠을 자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면 바가지, 대나무, 빨래집게일 것 같은 것이 바가지, 대나무, 빨래집게인 것으로 드러나거나 전혀 다른 엉뚱한 것임이 판명된다. 아주 가까이 다가가 시각이 촉각 수준이 되면 찍힌 대상들 외에 예기치 않은 것들이 예기치 않은 곳에서 툭툭 또는 스멀스멀 나타난다. 사진은 구체적인 대상을 찍음으로써 관객과 소통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도 알고 관객도 아는 매개물이 있어야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씨는 대상들이 이름을 잃는 새벽 3시에 찍는 행위를 함으로써 기왕의 사진 문법을 송두리째 부정한다. ‘송두리째 부정’은 곧 사진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다. 감상 방식도 뒤집어 버린다. 통상 큰 작품은 멀리서, 작은 작품은 가까이서 봐야 하는 법. 하지만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크기의 <오온> 시리즈는 정상적인 감상 거리의 관객은 “이게 뭐야?” 하고 지나가고, 하릴없는 관객의 콧김으로 사진 표면이 흐려질 때야 진면모가 드러난다. 이럴 수가! 검음 속에 이토록 많은 대상을 품고 있다니…. 오온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인식의 다섯 단계인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완전한 어둠에서 새벽을 거쳐 아침에 이르는 과정과 아주 흡사하다. 첫 단계인 색은 완전한 어둠 속에 대상과 내가 이름과 관념이 배제된 채 존재하는 상황. 수, 상, 행, 식은 상이 맺히고, 이름이 붙여지고, 반응을 부르면서 시니피앙(소리)과 시니피에(의미)가 따로따로 노는 낮 세상에 이르는 것. 작가의 선택은 빛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새벽 3시. 사진 작가이니 어쩌겠는가. 그가 울산의 온산공단으로 스며든 것은 새벽 3시로 들어간 것과 흡사하다. 범어사에 앞서 10년에 걸쳐 사실상 온산 주민들과 동거하면서 그는 온산 사람이 되었고 작가의 카메라는 더 이상 낯선 물건이 아니라 그들의 삽이나 그물바구니가 되었다. <메멘토모리> 속 인물들의 안중에 작가 역시 없다. 전깃줄 아래 고양이를 안은 소녀, 세탁소 앞 골목의 어깨를 잔뜩 움츠린 노인, 그리고 궁둥이를 맞댄 암수캐. 그들은 정사각형틀 속에 그냥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관객들의 시선은 정사각형의 모서리를 돌면서 대상들이 복화술처럼 들려주는 공단 이야기를 읽는다. 소멸함으로써 강하게, 아주 강력하게 발언하는 작가 이상일은 <메멘토모리>에서 뚜렷하게 각인됐다. 1980년 광주항쟁에서 계엄군이었던 그는 <망월동>으로 작가로서의 첫발을 디뎠다. 개인적인 속죄 의례였기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때 시작해 16년 동안 거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사진 속 망자의 사진과 펼침막 구호가 작가의 발언으로 치부되면서 ‘사적 다큐’가 역사의식이 깃든 다큐가 됐다. <으므니>는 늙은 어머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병석에서부터 시작해 땅에 묻히고 무덤에 풀이 돋기까지 프레임에 담은 것. 광주 망월동에서 온산공단을 거쳐 범어사에 이른 작가가 다음에 시선을 두는 곳은 어딜까. 벌써부터 주목되는데, 아주 싱거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존재의 끝에 다다른 느낌. 작가는 새벽 3시도 관념일 뿐이라 했으니 그게 어디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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