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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광부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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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 ‘광부 화가들’
신자유주의 시대에 예술의 가치는 무엇일까? 양극화로 혜택받는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인가, 아니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인가? 예술은 왜 필요한가? 지난 5일부터 명동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서 한국 초연으로 올려진 영국의 극작가 리 홀(44)의 연극 <광부 화가들>(각색·연출 이상우)은 그 질문과 대답을 함께 담고 있다. 1934년 어느 날 영국 북부 탄광촌 애싱턴 노동자교육협회 사무실에서 미술감상 강좌가 열렸다. “그냥 저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다구. 그거 설명하는 게 뭐 그렇게 복잡해.” 난생처음 미술감상 공부를 접한 광부들이 던지는 질문에 미술강사 라이언은 어쩔 줄 모른다. “그러게요. 그림은 그림이니까요. 팩트가 없으니까요. 과학이 아니라구요.” 라이언은 미술관을 가본 적도, 그림을 볼 일도 없는 광부들에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걸작을 보여주며 미술사를 강의하려고 한다. 그러나 막장에서 갖 빠져나온 광부들에게 ‘천지창조’나 ‘최후의 심판’, 아담의 탄생’ 등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들은 “하루종일 갱 속에서 박박 기다가 천사 그림이나 보자고 여기 오는 게 아니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라이언이 묘안을 짜내 광부들에게 “무조건 직접 그림을 그려보라”고 제안한다. 광부들이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해 그릴 줄 모른다”고 하자 그는 “테크닉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를 이해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격려한다. 1934년 탄광촌에서 출발한 최초의 광부들의 그림 모임인 ‘애싱턴 그룹’은 이렇게 탄생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극작가 리 홀이 2007년 발표한 <광부 화가들>은 평범한 광부들이 우연히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나름대로 예술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리 홀은 영국 작가 윌리엄 피버가 영국 북부 탄광촌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 <애싱턴 그룹>을 읽고 실제 탄광촌에서 자란 자신의 경험을 녹여 희곡을 썼다.
이 작품에서 조지와 해리, 올리브, 지미 등 광부들은 라이언의 지도와 영국에서 손꼽는 부호인 미술애호가 미스 헬렌 서덜랜드(문소리)의 아낌없는 후원을 받고 전국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화가라는 새로운 인생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예술이 교육받은 사람들, 특권층, 엘리트만이 배타적으로 누리는 것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뒤 끝내 광부의 삶을 선택한다. 이번 한국 공연은 2007년 뉴캐슬 라이브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네 번째다. 비 유럽권 국가에서는 최초 공연이며 오는 10월 예정된 브로드웨이 공연보다 앞선 것이다. 2008년 3월 영국 런던의 로열 국립극장 공연에서 리 홀이 밝힌 예술관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문화는 삶이다. 상품이 아니다. 그리고 예술은 당연히 우리 삶에 참여해야 한다. 진정한 예술은 공동의 것이고 능동적이다. 어느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숨 쉬는 지적이고 감정적인 공기이어야 한다. 예술은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수록 풍요로와진다. 사람들을 배척하면 할수록 우리는 가난해진다.” 한국 공연은 연극 <칠수와 만수>, <비언소> 등을 쓰고 연출한 이상우 (59)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과 교수의 각색과 연출력이 돋보인다. 그는 정치색 짙은 영국식 코미디극 특유의 지적이면서 거친 대사들을 순화시켜서 한국 배우들의 입과 한국 관객들의 귀에 익숙한 전달력 높은 문체로 다듬었다. 권해효 문소리 김승욱 이대연 윤제문 원창연 등 배우들의 진지하면서 코믹하게 긴장과 이완을 조율하는 연기력도 빼어나다. 무대를 거대한 스크린과 크고 작은 탁자, 의자, 이젤로 간결하게 꾸며 미술감상 교실이자 미술 전시회장, 라이언의 작업실, 서덜랜드의 갤러리 공간 등으로 활용한 무대 디자인 또한 돋보인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으로 너무 많은 그림을 보여줘 대사의 집중도가 오히려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낳는다. 말미에 미스 서덜랜드가 그림에서 도자기로 호사 취미를 바꾸면서 드러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허구, 전업화가와 광부의 길 사이에서 고민하는 올리브의 갈등 등은 밀도를 더 높여야 할 듯하다. 평소 명화를 접할 기회가 드문 관객이라면 고흐, 피카소, 세잔, 라파엘로 등 유명화가들의 걸작과 애싱턴 그룹 광부화가들의 그림 100여점을 감상할 수 있는 재미는 쏠쏠하다. 올해 개관 1돌을 맞는 명동예술극장이 지난 3월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에 이어 다시금 예술의 의미를 캐묻은 이 연극은 30일까지 공연한다. 1644-2003.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명동예술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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