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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7.28 19:37 수정 : 2010.07.30 15:38

연희단거리패가 연극 <오구>

죽음을 일상화한 22년 장수 연극
남미정·하용부 등 원년멤버 합류

‘문화게릴라’ 이윤택(58·영산대 학장) 연출가가 이끄는 연희단거리패가 연극 <오구>를 6년 만에 서울 무대에 올린다.

오는 30일 개관 25돌을 맞은 호암아트홀에서 막을 올리는 이 연극은 1989년 서울연극제 초연 이래 22년간 1200여회 공연에 35만 관객을 동원하며 연희단거리패의 장수 레퍼토리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초연 이듬해인 1990년 일본 도쿄국제연극제, 1991년 독일 에센 세계연극제, 1998년에는 베를린 세계문화의 집 초청 공연에 러브 콜을 받았으며, 국내 30여개 공연장 객석 기록을 갈아치우며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귀신 붙은 연극’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서울공연에 앞서 올해 10돌을 맞은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22일~8월1일)에서 지난 25일부터 27일까지 새로 문을 연 국내 최초의 야외 성벽극장 원형무대에서 대극장용 버전으로 1천여 관객에게 첫선을 보였다. 특히 지난 97년부터 주인공 노모 황씨 할매 역을 맡아 ‘오구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는 강부자씨와 원년 멤버 남미정(노모), 하용부(석출), 배미향, 김소희(무녀)씨 등 연희단거리패 단원과 영원한 ‘명품 조연’ 오달수(맏아들)씨 등이 출연해서 새 버전의 확장된 무대 공간을 농익은 연기로 채웠다.

연극계에서 “쌀 떨어졌을 때 <오구>를 하면 쌀이 생긴다”는 말이 돌 정도로 22년간 사랑받아온 <오구>의 매력과 힘은 무엇일까?

■ 장례가 놀이고, 친구 어머니는 배우

<오구>는 팔순 노모 황씨 할매의 죽음을 두고 상갓집에서 벌어지는 엉뚱한 해프닝과 형제간의 갈등 등을 질펀한 한판 ‘오구굿’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작가이자 연출가인 이윤택씨가 실제 자신의 팔순 노모의 네 시간짜리 잔소리를 줄거리로 엮어 공연을 올렸고, 그가 치렀던 부모의 초상 경험을 꾸준히 작품에 녹여냈다.

특히 그가 1987년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다가 겪었던 재미난 경험이 계기가 되었다. 화투를 워낙 즐겼던 그 친구가 사모관대를 벗고 친구들과 열심히 화투를 치다가 문상객이 오면 얼른 일어나 “아이고~ 아이고~” 하고 슬프게 곡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뒤집어졌다. 또 친구 어머니께서 “아~ 아~”하고 울다가 그가 다가가자 “아이고 왔나~ 밥 묵어라, 밥 묵어라”고 되뇌는 것을 보니까 완전히 배우였다. “장례가 놀이야. 이게 연극이다. 일상과 현실, 죽음이 그냥 왔다갔다하더라. 그러면서 예전에 내가 무대에 올렸던 김석출 별신굿과 김수영 시인의 시 <병풍>이 문득 생각나더라.” 그는 “<병풍>에서 김수영 시인은 병풍 저 너머에 주검이 있다고 했지만 나는 연극 <오구>에서처럼 창호지 문살을 놓고 이쪽이 이승이고 저 너머가 저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다 89년 서울연극제 신청 마감을 하루 남겨놓고 1박2일 만에 <오구>의 대본을 단숨에 써내려갔다.

초연은 그의 연극계 선배 채윤일(64) 연출가가 했다. 무당 석출 역은 당시 목화 배우였던 김응수씨가 맡았는데 비쩍 말라서 서연호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가 진짜 무당이 출연했다고 평을 쓸 정도로 실감이 났다. 채씨는 “연습 중에 서울 퇴계로에서 내가 탄 차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뒤집힌 사고가 일어나 백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며 초연의 진통을 털어놓았다.


■ 굿과 연극 논쟁 불러일으킨 오구

이윤택씨의 <오구>는 삶과 죽음의 깊은 경계를 신명 나는 굿 한판으로 녹여낸다. 인생의 일부지만 늘 두렵고 무서운 것이라 여겨져 온 죽음을 익살스러운 재담과 몸짓으로 코믹하게 그려냈다. 또한 망자에 대한 슬픔을 한국 특유의 해학적 정서로 춤추고 노래하게 했다. 남미정, 오달수, 하용부, 박은홍씨가 출연한 <오구>는 90년부터 96년까지 대박 행진을 거듭했다. 중요무형문화재 68호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인 하용부(55)씨는 “부산 가막골 소극장에서는 극장 바깥에 150미터가 넘게 줄이 이어졌다”며 “지금도 그때 연극을 본 사람들을 만나면 <오구>를 보고 연극이 재미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하더라”고 귀띔했다.

그러다 1990년 연극평론가 이상일씨가 <한국연극> 7월호에 <오구>에 대해 비평하면서 유명한 ‘오구 논쟁’이 벌어졌다. 이상일씨는 “굿은 굿이고 연극예술이 아니다. 굿의 신앙을 믿는 것도 아니면서 신대처럼 깃발을 흔들어대는 젊은 세대의 자가 당차”이라고 혹평했다. 그러자 이윤택씨는 다음 호에 “굿에 현상적으로 심취하고 학문적 얼개로 이해하려 한 우리 문화계의 굿 전문학자”들의 오류라고 지적하면서 “단적으로 말해 굿은 우리 민족의 원형 연극”이라는 반론을 발표했다. ‘오구 논쟁’은 당시 연극계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고 오히려 이 연극이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연희단거리패가 연극 〈오구〉

■ 오구의 위기와 강부자표 오구의 탄생

‘오구의 대중화’에는 ‘국민 엄마’ 강부자(69)씨가 일등공신이다. 그는 97년부터 노모 역을 맡아 당시 구제금융의 경제한파 속에서도 1998년 공연 20일 만에 매표수입 1억2천만원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대박 행진을 하던 <오구>는 잠깐 위기를 맞기도 했다. 96년부터 관객발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윤택씨가 <오구>를 접자고 하자 22살부터 노모 역을 맡았던 초연 배우 남미정(42)씨가 “진짜 할머니를 모시자”고 제안했고 만장일치로 강부자씨를 추천했다. 이씨가 찾아가자 강씨가 “연극 <연산>을 잘 보았다”며 “조건 없이 하자”고 했다. 강씨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윤택이라는 연출가가 파격적이면서 하여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있는 차에 이미 기존에 공연되고 있는 작품을 제한테 하자고 와서 무척 기뻤어요.” 강씨는 “50년 가까이 연기생활을 하면서 제에게 가장 어울리는 연극이고 배역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털어놓았다.

97년 강부자의 <오구>가 정동극장에서 공연할 무렵 어느 날 강남에서 무녀 30명이 5만원 로열석을 단체로 예약했다. 한복을 입고 머리에 쪽을 찌고 부채를 들고 입장하자 극단에서 긴장했다. 1막에서 무당역을 맡은 배우들이 객석을 돌아다니며 시주를 받자 그들이 “직접 시주하겠다”고 무대로 올라왔다. 그러더니 쌍부채를 탁 펴면서 춤을 추는데 연습한 것처럼 호흡이 딱 들어맞았다. 진짜 굿판이 30분이나 벌어지고 관객들이 열광했다.

■ 오구의 힘, 오구의 매력

1990년 연희단거리패의 무명배우 ‘문상객’ 1호로 첫 무대에 올랐던 오달수(42)씨가 2000년 정동극장 공연 이후 만 10년 만에 맏아들 역으로 돌아온다. 그는 “밀양에서 <오구>를 연습하면서 대학생으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이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현실과 또 다른 상상 속의 세계를 대신 보여주고,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욕망을 까발리고 후련하게 씻겨주는 것이 이 연극의 매력인 것 같다”고 풀이했다. 저승사자 역을 맡은 윤종식씨는 “관객들이 <오구>를 보고 울고 웃고 할 때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우리 정서는 살아있더라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20대에 칠순 노모 역으로 능청스런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남미정씨는 “<오구>가 22년간을 버텨온 것은 관객들의 힘”이라며 “이 연극을 하면서 배우로서 제 삶의 성장이나 성숙을 점검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연극평론가 이진아 숙명여대 교수는 오구가 장수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대중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구>에서 굿은 우리 일상과 밀접한 것으로, 아직 살아있는 진짜 문화로 들어와 있다. 극장 안에서 굿판이 벌어질 때 관객도 함께 자신의 구복을 빌고 하는 것이 대표적인 대중성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소극장 연극에서 올해 처음 600석 규모의 호암아트홀에서 대극장 버전으로 선보이는 <오구>는 9월5일까지 공연된다. (02)751-9606~10.

밀양/글·사진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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