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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기의 1980년 작. <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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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발언’ 30주년 기념전
난해한 서구식 현대미술 벗어나‘예술은 현실 반영’ 명제로 작업 오윤 유작전 등 ‘그때 그 그림’ 전시
창립전 좌절 ‘아르코’ 대관 또 불발 “우리는 처음 표현이 아닌 발언을 했다. 그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거다.” 한국 문화예술위원장을 하다 현 정부에 의해 강제 해임된 작가 김정헌씨는 30년 전 자신이 참여해 만들었던 한 청년 미술인 모임의 의미를 이렇게 풀었다. 그 모임이 저 유명한 ‘현실과 발언’(약칭 현발)이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 10월 첫 전시를 열며 등장한 ‘현발’ 동인 작가 10여명의 작품은 당시로선 불온하기 짝이 없었다. 흰색, 회색 단색 물감을 화면에 들이붓고 난해한 철학적 설명 붙이기를 현대미술의 정석으로 알던 당시 제도권 풍토에 현실을 정면으로 까발린 문제작들로 통렬한 일침을 놓았던 것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세숫대야를 경건하게 응시하며 세수하는 사람을 그렸다. 여성 속옷을 비롯한 온갖 야한 소비상품 광고를 짜깁기해 천민 소비사회를 조롱하는 콜라주를 만들었고, 코카콜라 판치는 세상을 전통 불화의 감로탱 그림으로 패러디했다.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색채그림을 호텔방의 지질한 풍경으로 바꾸었고, 모래밭에서 담배피우며 파리 잡는 ‘꼰대’를 아방가르드 화신으로 쓱싹거린 패러디 드로잉도 출몰했다. 기획 전시나 연구의 주제도 도시, 미국, 한국전쟁 등 그동안 미술계에서 생각도 하지 않았던 금기와 현실을 다루었다. 1980년 10월 서울 대학로 옛 미술회관(현 아르코 미술관)에서 시작한 현발 창립전이 미술관이 조명등을 꺼버리면서 단 하루 만에 끝나고, 결국 한달여 뒤 동산방 화랑에서 다시 창립전을 열어야 했던 곡절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충 덕택에 지금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키치와 팝 등의 대중문화와 독한 풍자를 보편적인 작품 언어로 쓸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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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서기 포즈를 취한 초창기 ‘현발’ 회원들. 왼쪽부터 김정헌, 성완경, 노원희, 이태호, 김건희, 최민, 윤범모, 김용태, 임옥상, 강요배. 현실과 발언 30년 전시기획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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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달여 비평 모임을 거쳐 준비된 ‘현발 30년전’은 자료 모음 측면에서 의미가 크지만 실망감도 적지 않다. 창립전이 열렸던 동산방과 아르코 미술관에서 다시 전시하기를 많은 미술인들이 원했지만, 결국 사전 협의 문제 등으로 무산됐다. 결국 불과 100여 m 거리인 동산방을 놔두고 상업화랑 공간에서 창립전을 재현하게 됐다. 창립전이 좌절됐던 아르코 미술관은 현재 정치적 상황에선 대관이 힘들 것이라는 예상 등으로 이번에는 아예 신청을 단념했다는 후문이다. 30년 주기로 되풀이된 기구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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