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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서 밀려나 성북동으로
“마음껏 다듬을 공간 생겨 행복”
‘세일즈맨의 죽음’ 등 6편 공연
도발과 실험으로 무장한 연극 연출가 김현탁(42)씨가 이끄는 연극집단 ‘성북동 비둘기’가 지난 9월1일 대학로에서 한참 벗어난 서울 성북동 100-1번지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연극실험실 일상지하’로 이름을 붙인 30평 규모의 공간은 소극장이라기보다는 그냥 지하실에 가깝다. 마감이 덜 된 듯한 거친 콘크리트 천장과 기둥, 시멘트 바닥 그대로가 무대와 객석이다. 마치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에서 번지가 없어진 비둘기처럼 한국 연극의 메카 대학로가 상업지구로 변모하면서 외곽으로 밀려났지만 이들은 행복하다. 하루에 40만~70만원씩 내야 하는 극장 대관료 걱정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저희가 충분히 고민해서 작품을 만들고 공연하고 다듬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겨서 기쁘죠. 그동안은 비싼 대관료 때문에 공연을 길게 못하니까 무언가 부족하다 싶으면 이미 공연이 끝나있어요. 이제는 저희만의 극장과 연습실이 있으니까 공연을 하면서 계속 부족한 것을 찾아 채워가고 바꾸는 재미가 있어요. 그래서 작품이 알차게 다져지면 해외연극제에도 나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현탁 연출가는 “지금 저희가 대학로의 끝자락 너머로 밀려났지만 대학로에 연극 유민들이 더 많이 생겨나면 언젠가는 성북동 연극동네의 첫머리에 있을 것 같다”고 밝게 웃었다.
간판 배우 이진성(52)씨도 “그동안 연습실이 없어서 지인들의 작업공간을 전전했는데 이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음껏 연습하고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서 너무 행복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비록 시설이 빈약하지만 2005년 극단 창단 당시 순수한 연극정신으로 충만했던 그 시절을 되새기면서 새로운 연극적인 실험을 꾸준히 해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새 공간 개관에 맞춰 9월24일부터 그들의 장기인 ‘고전 비틀기’ 시리즈를 시작했다. 첫 작품으로 지난달 고전소설 <춘향>을 룸살롱을 배경으로 삼아 성욕에 목말랐던 당시의 일탈로 풀이한 <싱, 링, 스프링 앤드 피 춘향>(9월24일~10월17일)을 선보여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지난 4일부터는 두번째 작품으로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12월17일까지)을 무대에 올렸다. 러닝벨트 위를 쉼 없이 달리는 주인공 윌리 로만의 모습을 통해 냉혹한 자본주의의 전쟁터로 내몰린 가장의 존재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앞으로 쪽방촌과 임대 아파트를 배경으로 가난과 소외문제를 다룬 김영수의 혈맥(내년 1월3~31일), 현대 매스미디어와 네트워크의 병폐를 꼬집는 에우리피데스의 <메디아>(2월24일~4월10일), 섬 대신 동네 카지노와 불법 도박장을 무대로 등장시킨 천승세의 <만선>(4월28일~6월5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모티브를 도입한 헨릭 입센의 <헤다 가블러>(6월23일~8월21일)가 한달 간격으로 이어진다. 내년 8월 중순까지 배우 8명이 저녁에는 공연하고 낮에는 다음 작품을 연습하는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김현탁씨가 대표와 연출을 맡고 있는 성북동비둘기는 2005년 연극 트레이닝 집단인 ‘공연수작걸다’의 중심 배우인 이진성, 성석주(46), 김미옥(37), 박선주(32)씨 등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연극문화 제시를 위한 실험성과 상상력의 극대화’를 내걸고 만들어졌다. 그동안 장 주네의 <하녀들>을 각색한 <풀장의 하녀들>, 차범석의 <산불>을 바탕으로 한 <김현탁의 산불>, <김현탁의 햄릿> 등 국내외 고전을 도발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작품을 선보여왔다. 이들이 무대에서 보여준 저항과 도발, 충격과 새로움은 국내 연극계에서 우려와 기대, 질타와 찬사를 동시에 받아왔다.
김 연출가는 “고전들을 비트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고 현대의 나와 관객들에게 부족한 무언가를 채워주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것은 항상 기존의 것들과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새로운 표현양식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죠.” 새로운 연극적 실험의 가능성과 새로운 공연예술의 패러다임을 벼르고 있는 비주류 연극집단의 겁없는 작업이 기대된다. (02)766-1774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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