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1.12 09:30
수정 : 2010.11.1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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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기적의 도서관. 금혜원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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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건축의 권위자 정기용씨 기획전 ‘감응’
기적의 도서관·무주 프로젝트 등
자연과 인간 상생하는 설계 실천
분신같은 ‘연필소녀’ 애니메이션
스케치와 메모 등 100여점 전시
눈이 큰 소녀는 마냥 걷는다. 손에 든 생각하는 연필로 쓱싹쓱싹 그림을 그리면 앞으로 나갈 곳이 생겨난다. 문고리 없는 문에 손잡이를 그려 문을 열고, 차곡차곡 계단을 그려 성큼성큼 올라간다.
그런데, 앗! 산성비 죽죽 내리는 도시의 빌딩 숲이 덮치듯 닥쳐온다. 소녀는 코를 싸매쥐고 빌딩 사이를 뛰쳐나왔다. 그러다 ‘쿵!’ 소녀는 무언가에 부딪혀 쓰러진다. 가지가 치렁치렁 뻗은 푸른 나무 밑. 소녀는 편안해진다. 그곳에서 나뭇잎과 별을 보며 맴을 돈다. 낙하산 타고 다시 다른 땅에 떨어지기도 하고. 땅을 기어가는 달팽이를 보고 쪼그려 인사도 청해본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언제나 앞으로 가야만 하는 힘든 걸음, 하지만, 소녀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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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도서관 스케치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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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필 소녀’는 지금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 3층 전시장 흙담벽에 출몰하고 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찍은 정재은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 <나무를 찾는 소녀>다. 그런데 그의 진짜 정체는 남자. 나이 예순이 넘은 중견 건축가다. 2000년대 이후 ‘기적의 도서관’ ‘무주 프로젝트’ 등으로 한국 공공건축에 훈기를 불어넣은 대가 정기용(65)씨의 아바타다. 작가가 머릿속에서 생각하던 자신의 모습이 바로 ‘어린 소녀’와 같다는 고백에 바탕해 만든 것이다.
이 연필 소녀는 이 미술관이 11일부터 정씨의 건축 인생 40여년을 풀어 보여주고자 마련한 기획전 ‘감응’의 중요한 소품 가운데 하나다. 소녀의 영상 이야기는 정씨가 30여년 혼자 추적추적 걸어온 건축 인생의 집약판과도 같다.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를 설계한 건축가로 유명한 정씨는 건축의 철학, 친환경성을 중시한다. 생태적이고 유기적인 건축을 위해 흙을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고, 주류 건축가로서는 실로 드물게 지역의 공공건물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실제 설계에 참여했다. 건축은 사적이든 공적이든 만인의 풍경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연과 인간 공동체가 시간을 매개로 상생하는 지혜가 한국 공공건축의 해법이라는 것을 묵묵한 실천으로 보여주어온 것이다. 전북 무주 부남면의 천문대 딸린 주민 자치센터와 환경 친화적인 학교 건물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달팽이 도서관 등이 그 값진 결과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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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진도리 마을회관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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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는 ‘건축가는 삶의 설계자이자 조정자’라는 그의 지론을 담은 방대한 사색의 자료들을 쌓았다. 1960년대 그의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건축스케치와 드로잉 100여점이 나왔다. 혀를 내두르게 하는 날것 같은 스케치 드로잉 메모들을 통해 그의 생태 건축, 흙 건축, 자연 건축의 개념이 형성된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여느 건축전처럼 정교하고 복잡한 도면은 별로 내지 않았지만, 관객들은 독서하듯 그의 세계를 꼼꼼히 읽어내려가야 하는 전시다. (02)2020-206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일민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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