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에 발 담그고 리듬 타는 맛
지겨운 비 때문이었다. ‘최고의 휴가지는 집’이란 굳은 믿음을 깨고 2박3일씩이나 나들이를 감행한 건. 집에만 있으려니 타고난 ‘방콕’ 체질인 몸도 슬슬 좀이 쑤신다. 그런데, 연극제라고? 주말 동안 다녀오면 딱 좋을 스케줄. 갈까 말까, 갈등하다가 ‘갈까’와 ‘말까’를 택했을 때 각각 뭐가 좋고 나쁠지 계산해봤다.
#1. ‘갈까’: 쉽게 보기 힘든 야외공연, 여행 명소 발견, 더위, 약간의 피로, ‘어디든 다녀왔다’는 뿌듯함.
#2. ‘말까’: 20시간 이상의 수면, 주말 예능프로그램, 비, ‘눈 한번 깜박였을 뿐인데’ 돌아온 월요일의 허무함.
근소한 차이로 ‘갈까’의 승. 이번 주말은 연극제에서 놀아 보자. 문화부 선배(정상영, 송호진 기자)들도 같이 떠난다고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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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사람들처럼 계곡물에 발 담그고, 튜브에 기댄 채 누워 공연 보는 맛이 어떨지 궁금하다면 거창으로 떠나라. 지난달 30일 거창국제연극제 무지개극장에서 열린 러시아 전자현악기 그룹 미에르바의 공연 모습이다. 거창/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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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뚫고 날아온 배우의 대사가 가슴에 박히면, 어느새 연극의 감흥이 빗물처럼 온몸을 적신다. 연희단거리패가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에서 빗속에서 공연하고 있다. 우비는 나눠준다.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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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 발 담그고 리듬 타는 맛
■ 계곡에서 즐기는 연극 피서 7월29일 낮 2시. 서울에서 버스로 4시간 남짓 걸려 경남 거창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더운 공기가 훅 밀려온다. 강렬한 햇빛, 눈 뜨기가 어렵다. 출발 때만 해도 빗방울 돋아 서늘했는데…. 참, 여름은 원래 덥지?
거창국제연극제가 차려진 무대는 군내 위천면 수승대. ‘원학동 계곡’을 가운데 두고 숲이 어우러진 피서 명소다. 계곡 따라 죽죽 늘어선 야영객 텐트들. 다른 한쪽에선 주민들이 삶은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관람객에게 공짜로 나눠주고, 전통가락이 쟁쟁 귀를 울린다.
<거창일소리>, <거창삼베일소리> 보존회 회원들인 거창 아줌마, 할머니들의 노랫소리가 흥을 띄운다. ‘함안화천농악팀’까지 가세해 3시간 동안 난장이 펼쳐졌다. 할머니가 한 접시 가득 고기를 썰어준다. “돼지 두 마리 잡고, 막걸리는 한 10말 담갔지. 남기면 안 돼.” 고무통에 담긴 막걸리는 한두잔만 마시고 돌아설 수 없는 맛이다. 벌써 거나하게 취한 할아버지가 걸어나와 덩실덩실 어깨를 들썩이자, 한 할머니가 옆 할머니에게 놀려댄다. “야, 니네 서방 나가서 춤춘다.”
저녁 8시, 한낮의 더위는 한풀 꺾였다. 야외 ‘축제극장’에선 개막작인 연극 <템페스트> 공연이 막을 올렸다. 연극판의 거장 오태석 연출가(극단 목화)가 만든 이 작품은 올해 영국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 초청작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더했다. 동생에게 왕위를 뺏기고 무인도에서 딸과 12년 동안 살고 있는 왕은 동생 일행이 무인도 앞바다를 지나자 도술로 태풍을 일으킨다. 조난당한 일행에게 복수하기 위해 마법을 부리는 와중에 왕의 딸과 동생의 아들이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가야금, 아쟁, 생황, 피리, 장구 등 전통악기 연주와 전통연희의 만담, 씻김굿까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 벌레 울음소리가 따라붙고 한밤중 야외공연은 더욱 무르익는다.
다음날 낮 2시. 계곡물 위에 수상무대가 등장했다. 연극제의 백미란다. 이름하여 ‘무지개극장’. 러시아 전자현악기연주그룹 ‘미에르바’가 연주를 시작하자, 물놀이를 즐기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튜브에 탄 아이는 리듬에 맞춰 넘실넘실 물을 튕긴다. 어른들은 허리까지 오는 계곡물에 서서 박수를 친다. 무대 건너편 야영장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삼겹살을 씹으면서 공연을 본다. 한낮의 더위에 시원한 계곡물은 어느 시설보다도 근사한 무대 장치다. 수중공연에, 야외극장의 연극도 마음껏 볼 수 있으니, 이만한 여름 여행이 또 있을까.
장대빗속 열연에 관객들 “최고”
■ 빗속에서 완성된 ‘우리’의 연극 둘째 날인 30일. 거창에서 차로 2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현장. 처음 일행을 맞은 건 뜻밖에도 장대비였다.
저녁 8시10분, 우두둑 빗방울 소리가 들리더니 빗줄기가 사정없이 몰아친다. 밤 10시 1000석 규모의 야외 ‘성벽극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어머니> 공연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지정석 600석은 다 팔렸는데. 주최 쪽은 비가 그치거나 빗줄기가 가늘어지면 공연을 강행하려 했지만, 비는 2시간 넘게 몰아쳤다. 우비를 입었는데도 팔다리까지 흠뻑 젖었다. 주인공 손숙 등 배우 25명은 분장한 채 빗줄기를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공연 스태프는 긴장 속에서 뛰어다녔다.
밤 9시30분, 결국 공연 취소. 배우 손숙은 “진짜 속상하네!”라며 안타까워했다. “밤 11시에 하면 안 돼요?” 다른 배우들도 아쉬워했다. 이윤택 예술감독은 담배 한 갑을 다 피웠다.
<어머니>팀이 초조해하는 사이 다른 쪽에서 박수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야? 연희단거리패의 연극 <길바닥에 나앉다>가 열린 300석 규모의 ‘숲의 극장’ 쪽이다. 가보니 관객과 배우들이 빗속에서 하나 되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참이다. 전날 공연장 위에 임시로 쳐 놓은 천막 지붕이 새어 무대 위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황.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에 젖은 배우들은 대사 소리를 파묻으려는 빗소리를 뚫기 위해 목소리를 더 높였다. 전날 새벽 연습 중 머리를 다친 배우 윤종식은 6바늘을 꿰맨 채 팬티 바람으로 연기하며 객석의 박장대소를 끌어냈다. <길바닥에 나앉다>는 인간의 모습을 한 동물이 등장하는 ‘현대판 금수회의록’. 도로에 참기름을 바르며 도시전복을 꾀하는 기린, 멧돼지와 그들을 지켜보는 노루, 중간중간 등장하는 경찰, 사냥꾼 등이 인간 세상을 풍자하는 블랙코미디다. 쉬운 내용이 아닌데도 하얀 비닐 우비를 입고 객석과 바닥까지 메운 관객들은 빗물과 땀이 뒤섞인 배우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빠져들었다. 비 때문에 자리를 뜨는 관객은 없었다.
밤 10시. 공연이 끝나고 모든 배우들이 극장 밖에서 비를 맞으며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관객들은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최고야. 최고”, “너무 멋졌어요.”
몇몇 관객들은 “손이 더러워요”라는 배우들의 만류에도, 공연 소품인 흙으로 범벅된 배우들의 손을 “아유, 괜찮다”며 꼭 잡아줬다. “무대에 빗물이 흘러서 혹시 배우들 감전되지는 않을지 걱정했는데요. 공연도 너무 재밌었고, 새롭고 감동적인 경험이었어요.” 딸과 함께 왔다는 밀양 시민 김정희(46)씨의 소감.
“비가 오는데도 관객들이 꼼짝도 안 하고 집중해주는 걸 보면서, 배우들이 정말 소중한 경험을 했을 거예요.”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가 살짝 눈물을 비쳤다. 감격하기는 이윤택 예술감독도 마찬가지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연극이란 바로 이런 맛이다. 배우와 관객들이 빗속에서도 서로 교감하는 것을 봐라.” 연극인들이 끊지 못한다는 무대의 매력, 직접 보고 나니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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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바닥에 나앉다> 배우들이 빗 속에서 관객들을 배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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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관객 어울려 한밤 맥주파티
■ 연극이 끝나고 난 뒤 공연이 끝났다고 그 열기마저 식지는 않는다. 한밤중 밀양연극촌의 관객쉼터는 또하나의 무대로 변했다. 공연을 마친 배우들과 관객들이 후끈 달궈진 기분을 시원한 생맥주로 식히려고 몰려들었다.
밤 11시, <길바닥에 나앉다>의 연희단거리패 배우들과 마주앉았다. 이번 연극제에서 배우 이승헌은 연극 6편을 뛴다고 한다. 배우 윤정섭은 유독 대사가 많은 연극 3편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이승헌은 “정섭의 유일한 특기는 대사 빨리 외는 거다”라고 소개하자 다른 배우들이 폭소를 터뜨린다. 잔이 부딪히고 이야기가 무르익으면서 각종 무용담이 난무한다. 누구는 초년 배우 시절 조명에 쓸 수은등 대신 형광등을 사와서 혼났던 일, 누구는 암전 장면에서 퇴장하다 무대에 부딪혀 머리를 다친 일 등 실수담들이 쏟아져나왔다.
배우 이승헌에게 “왜 연극을 하느냐”고 물었다. “지금 제 형편으로는 중저가 브랜드 옷밖에 못 입지만, 다른 동료 후배들과 함께라면 고급 브랜드 옷을 입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머리의 상처에도 아랑곳없이 진통제 맞고 투혼 연기를 펼친 배우 윤종식은 “무대가 편하다”고 했다. 그는 95년 연희단거리패에 입단한 뒤 2005년 생활고로 연극을 접었다가 지난해 6년 만에 복귀한 베테랑. 옆자리, 박근형 연출가가 이끄는 극단 골목길팀에서 환호가 터져나왔다. 어느 배우의 생일. 초코파이에 꽂힌 성냥개비마다 불이 붙고 축가가 밤 하늘에 울려퍼진다. “그대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러자 누가 외쳤다. “우리는 관객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31일 오후 1시, 떠날 시간이다. 2박3일 연극 여행의 한 줄 결산 : ‘한번 더 갈까?’
bomi@hani.co.kr
문화야 놀자 Tip
23회 거창국제연극제 늦지 않았다. 경남 거창 위천면의 관광지 수승대에서 13일까지 계속된다. 극단 몸꼴 <리어카 뒤집어지다>, 인천시립극단 <아빠의 청춘>, 연희단거리패 <천국과 지옥>, 서울예술단 <청이야기> 등 공연이 여럿 남아 있다. (055)943-4152, www.kift.or.kr
10회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서두르자. 경남 밀양 부북면 가산리 밀양연극촌에서 7일까지 열린다. 연희단거리패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 <밥의 사랑>, 폐막작 <맥베스> 등 놓치기 아까운 연극들이 많다. (055)355-2308, www.stt1986.com/stt_new/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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